허먼 멜빌(Herman Melville), 김석희 옮김, «모비딕», 작가정신, 2010.
원제: Moby-Dick (1851년)
바다에 나갈 때면 나는 돛대 바로 앞에 서 있거나 앞갑판으로 곧장 내려가거나 로열마스트 꼭대기로 올라가야 하는 일개 선원으로 간다. ··· 처음에는 꽤 힘든 일이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 타르 단지에 손을 집어넣어야 하는 일반 선원이 되기 직전까지 시골에서 학교 선생으로 위세를 부리며 가장 덩치 큰 학생들까지도 벌벌 떨게 했다면, 어떤 경우보다도 가장 힘들 것이다. 미리 경고해두거니와, 교사에서 선원으로 전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을 씩 웃으면서 견딜 수 있으려면 세네카와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달인 진액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괴로움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진다. ··· 나는 언제나 일개 선원으로서 바다에 나간다. 앞갑판에는 건강에 좋은 운동과 맑은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 앞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은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 훨씬 우세하고, 따라서 뒷갑판에 있는 선장은 대부분 앞갑판의 일반 선원들이 마시고 뱉은 공기를 다시 들이마시게 된다. – 35
오! 죽은 이들을 초록빛 풀 밑에 묻은 사람들, 꽃 사이에 서서 “여기, 바로 이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누워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쓸쓸함을 알지 못한다. 검은 테를 두른 저 대리석 밑에는 한 줌의 재도 들어 있지 않으니, 그 공허는 얼마나 쓰라린가!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는 저 비문 속에는 얼마나 큰 절망이 숨어 있는가! – 75
아무리 뻣뻣한 편견도, 사랑이 일단 솟아나 그 편견을 구부리기 시작하면, 얼마나 부드러워지는가. – 100
항구는 자비롭다. 항구에는 안전과 안락, 난로와 저녁식사, 따뜻한 담요, 친구들, 우리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 강풍 속에서 항구나 육지는 그 배에 가장 절박한 위험이 된다. 배는 모든 환대를 피해서 도망쳐야 한다. 배가 육지에 닿으면, 용골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배 전체가 몸서리칠 것이다. 배는 돛을 모두 펴고 전력을 다해 해안에서 멀어지려 한다. 그러면서 배를 고향으로 데려가려는 바로 그 바람과 맞서 싸우고, 또 다시 거친 파도가 배를 때리는 망망대해로 나가려고 애쓴다. 피난처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위험 속에 뛰어든다. 배의 유일한 친구가 바로 배의 가장 고약한 원수인 것이다! – 170
내가 죽을 때, 내 유언 집행인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빚쟁이들이 내 책상 속에서 귀중한 원고를 발견한다면, 나는 모든 명예와 영광을 포경업에 돌린다고 여기서 미리 밝혀 두겠다. 포경선이 나의 예일 대학이며 하버드 대학이기 때문이다. – 177
스타벅은 일부러 위험을 찾아다니는 십자군 전사는 아니었다. 그에게 용기는 감정이 아니라 다만 자기에게 유용한 것이었고, 실제로 꼭 필요한 경우에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늘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 포경업에서 용기란 쇠고기나 빵처럼 반드시 배에 갖추어야 하고 어리석게 낭비하면 안 되는 주요 품목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가 진 뒤에 고래를 잡기 위해 보트를 내리거나, 너무 고집스럽게 저항하는 고래를 고집스럽게 공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 181
인간 세상은 주식회사나 국가처럼 혐오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 182
‘피쿼드’호의 우울한 선장은 그렇게 천박하고 거만한 태도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요구하는 존경은 다만 명령에 절대적으로 즉각 복종하라는 것뿐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뒷갑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반드시 신발을 벗으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 바다의 중요한 관례와 전통을 어기는 일은 결코 없었다. – 222
지금 에이해브는 마음속으로 이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내 수단은 모두 건전하지만, 내 동기와 목적은 미쳤다는 것. 하지만 이 사실을 없애거나 바꾸거나 회피할 힘은 없다. 그는 또한 자기가 오랫동안 인류에게 시치미를 뗐고, 어느 정도는 아직도 인류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속이고 있다는 그 사실은 그가 감지할 수 있는 대상일 뿐, 그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 276
그런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그 일을 하기에 신체적으로 부적합하다 해도, 고래를 공격하라고 고함을 치면서 부하들을 독려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적임자처럼 보일 것이다. … 여기, 신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백발노인, 증오심에 가득 차서 욥의 고래를 찾아 세상을 돌아다니는 노인이 있었고, 그의 부하 선원들은 주로 더러운 배반자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그리고 식인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스타벅은 미덕과 상식을 가졌으나 동조자가 없어서 별 영향력이 없었고, 스터브는 태평한 성품이어서 매사에 무관심했으며, 플래스크는 모든 면에서 평범한 위인이어서, 정신적인 지주가 될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런 항해사들의 지휘를 받는 선원들은 처음부터 에이해브의 편집광적 복수를 돕게하려는 목적에서 어떤 악마적 운명에 의해 특별히 차출된 일당인 것 같았다. – 279
오오, 인간들이여! 고래를 찬미하고 그들을 본받아라! 그대들도 얼음 속에서 따뜻한 체온을 유지해라. 그대들도 이 세상의 일부가 되지 말고 이 세상 속에서 살아라. 적도에서는 시원하게 지내고, 극지에서도 피가 계속 흐르게 하라. 오오, 인간들이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거대한 돔처럼, 그리고 고래처럼, 어떤 계절에도 그대 자신의 체온을 유지하라. – 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