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젤리히만(Rafael Seligmann), 박정희 등 옮김,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생각의나무, 2008.
독일국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 대해 그 원인을 이성적으로 규명하는 대신 속죄양을 찾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 p. 67.
분노에 찬 히틀러의 말을 들어보면 독일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베르사유조약과 유대인 때문이었다. – p. 72.
1920년 말에 그는 독일공산당 지도부에게 <푈키셔 베오바흐터>라는 망해가는 신문을 사들이도록 지시했다. [···] 상설 선전도구를 소유하게 된 히틀러는 최선을 다해 그것을 이용했다. – p. 77.
<결핵균과 박테리아를 상대로 토의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죽여 없애야 하는 것이다>라는 파울 데 리가르데의 단언은 히틀러의 신조가 되었다. – p. 84.
히틀러가 전개한 생각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반유대주의는 바그너와 리가르데, 란츠 폰 리벤펠스, 체임벌린, 마르, 폰 쇠너러 등 앞서 등장했던 유대인 증오자들의 개념과 표현들을 뒤섞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유대혐오의 이론가들에게는 의미 있는 추종세력을 동원할 능력이 없었다. – p. 106.
<히틀러가 내 손을 잡았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그 커다랗고 푸른 눈은 마치 별과 같다> [···] 괴벨스는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고 박사학위도 받았다. 그런데도 늘 불안정했던 것은 아마도 신체적 결함과 생계의 망막함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불안한 학자는 겉으로 확고한 세계를 지닌 듯 보이는 실업학교 낙제생 히틀러에게서 의지할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수많은 독일인들이 괴벨스의 전철을 밟게 된다. – p. 119.
바그너에게 영향을 받아 화려한 연출을 좋아한 히틀러는 끈기 있는 설득이 아니라 장대하고 호화로운 행동을 선택했다. 히틀러 일당은 3월 21일 포츠담에서 ‘민족 고양의 날’을 기념했다. 날짜와 장소와 참가자는 심사숙고해서 결정되었다. [···] 3월 21일은 태양이 방향을 바꾸기 직전의 순간이자 봄이 시작되는 날, 새로운 출발의 날로 여겨진다. 1871년 비스마르크가 제국의회를 개최했던 날도 3월 21일이었다. 게다가 축제의 개최지를 포츠담으로 선택한 것은 프로이센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1864년부터 프로이센과 독일의 전쟁에서 사령관이자 참전용사로 활약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참석을 통해 더욱 강조되었다. 이 국가적 행사는 프리드리히 대제의 유골이 묻혀 있는 가르니존 교회에서 국가와 당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제국시대의 총사령관 제복을 입고 등장한 반면 히틀러는 수수한 복장에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힌덴부르크는 연설을 통해 의원들에게 이전처럼 당쟁을 벌이지 말고 독일국민의 신임을 얻고 있는 새 정부를 지지할 것을 당부했다. 히틀러가 원한 것도 바로 그런 말이었다. – p. 194.
1933년 7월 14일 독일정부는 ‘유전병 후손의 근절을 위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어서 철저한 검사를 통해 정신박약과 정신분열증, 조울증, 유전적 시각장애, 청각장애, 간질 그리고 심각한 신체기형을 찾아내고 강제불임 조치를 내렸다. [···] 제국 정부는 홍보 캠페인을 시작했다. 엄청난 치료비용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특수한 경우 비싼 요양시설이 일반적인 사치처럼 왜곡되어 ‘사회에 도움이 되는’ 동포들의 빈곤한 생활환경과 비교되었다. 영화 <유전병>(1937)은 안락사를 열렬히 옹호하였다. – p. 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