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캇시러(Ernst Cassirer), 최명관 옮김, «인간이란 무엇인가», 창, 2008.

소크라테스 철학의 독특한 성질은 어떤 새로운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새로운 활동과 기능에 있다. 이제까지 지적 독백으로 여겨져 온 철학은 대화로 변모하였다. 오직 대화적 혹은 변증법적 사고에 의해서만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지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 진리는 본래 변증법적 사고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서로 묻고 대답하는 주체들이 끊임없이 협동하지 않고서는 얻어질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경험적 대상과 같은 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행동의 산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새로운 간접적인 답을 얻게 된다. 인간은 쉴 새 없이 자기 자신을 찾는 피조물, 즉 그 생존의 모든 순간에 자기의 생존 조건을 검토하고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피조물임이 밝혀진다. 인간 생활에 대한 이 깊이 있는 연구, 이 비판적 태도 속에 인간 생활의 진정한 가치가 깃들어 있다. – p. 23.

인간의 생활과 그 행동을 이해하는 것 이외에 달리 인간을 아는 방도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단일하고 단순한 공식 안에 포괄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모순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진정한 요소이다. 인간에게는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 그는 존재와 비존재의 이상한 혼합물이다. – p. 33.

언어 철학은 여기에서 모든 상징 형식을 연구할 때 나타나는 딜레마와 똑같은 딜레마에 부딪친다. 이 모든 형식에서 최고의, 아니 유일한 임무는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형식들의 어느 하나도 동시에 사람들을 분할하고 분리시키지 않고서는 이 통일, 이 결합을 가져올 수 없다. – p. 227.

우리는 물리적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상징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원인 탐구의 방법과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의미의 범주는 존재의 범주에 환원될 수 없다. (…) 역사는 해석학의 영역에 포함되지, 자연 과학의 영역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 p. 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