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계호(T. K. Seung), 김주성 등 옮김, «직관과 구성», 나남, 1997.

문화의 다양성과 변이성을 알아챈 소피스트들이 깨달은 것은 인간에게 가장 중차대한 문제가 바로 문화선택문제이며, 문화선택을 하려면 어떤 평가기준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규범문제와 서술문제를 구별하게 되었던 것이다. (…) 야심만만한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는 소피스트의 교육이 장래 정치세계에서 성공하는 데 필수조건이었다. – p. 38.

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서로다른 인습을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는 초월적인 규범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주의야말로 감정윤리론, 인습주의, 상대주의, 실재주의, 그리고 허무주의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법전>>에서 주창된 정치제도는 현대자유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와같은 원숙기 플라톤의 거작은 노령기의 졸작으로 알려져, 대체로 서구철학계에서 거들떠보지 않았다. 반면에 비교적 미숙기의 작품인 <<공화국>>이 절정기 플라톤의 거작으로 찬양되어왔다. 이것이 플라톤과 그의 철학이 겪은 참혹한 불행이며 오해였던 것이다. (…) <<공화국>>과 <<법전>> 사이에는 드넓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초월적인 규범기준이 있다는 주장이고, 둘째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기에 제일 중요한 것이 정치공동체라는 주장이다. – p. 45.

규범플라톤주의를 이해하는 두 시각이 있는데, 하나는 마천루론이고 다른 하나는 암반론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마천루론은 플라톤의 천상세계를 풍성하게 그려놓는데, 그 세계는 규범규율과 규범척도로 장식된 완전체계이다. 암반론이 그려놓는 플라톤의 천상세계는 그렇듯 풍성하지 않고, 다만 기본적인 규범이상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 기본적인 직관관념이 없으면 수긍할 만한 어떤 구성작업도 불가능하다. 현실도덕을 구축하려 해도 마찬가지로 이와같은 기본관념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 (…) 구성주의와 직관주의는 상호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핵심명제이다. 이 명제를 입증해보고자 수많은 규범이론들이 벌이는 변증법 무대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무대에서는, 롤즈의 원초상황에서 길을 떠나 마지막에는 플라톤의 천상세계로 올라갈 것이다. – pp. 5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