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희랍철학논고», 민음사, 2007.

무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단순히 모르는 것인데 이것은 배운 바 없는 것을 뜻하며 또 하나는 모르면서 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 무지는 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 무지는 전자의 경우보다 더욱 심각한 무지이다. (…) 교양 교육에는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이 있는데 이 방법은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이루어진다. (…) 이 양자를 합해서 훈계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은 스스로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무지에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 후자의 경우에는 간접적인 방법이 사용된다. 즉 대화가 사용된다. 즉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대화를 통하여 그 견해doxa를 조사하고 그 말을 한군데로 모아 동일한 대상에 관하여 동시에 동일한 관점에서 모순에 빠지게 한다. – p. 57.

여기선 이말 했다가 저기선 저말 하는 인간, 예전에 거짓말 했던 거 까먹고 사실대로 말하다가 낭패보는 인간은 이런 모순에 빠지지.

철학의 강단성은 철학이 지적 엘리트의 소유물인 한 필연적인 규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철학이 엘리트의 협소한 생활 공간에 국한될 수 없는 본성을 지닌 한 철학은 개방된 만인의 생활 속에서 움트고 그 속에서 영양분을 빨아들이면서 성장해야 한다. 모든 사람의 현실적인 생활의 저변에서 제기된 철학의 문제만이 모든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이 모든 사람을 움직일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이어야 하지만 그것은 또 모든 시대의 속으로 파고 들어가 연결을 지어주어야 한다. 서양의 철학적 사고의 특징은 추상적인 체계로 상승한 후 다시 구체적인 지금, 여기로 내려와서 철학하는 데 있는 것이다. 가령 플라톤의 대화를 보면 이것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란 피와 살을 갖고 있으며, 정신을 소유한 인간의 산물이며 그러한 인간은 사회적이며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희랍에서 시작한 물리학은 시공간적인 4차원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았고 지각 표상이나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물질만을 물질의 진상으로 보지 않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시공간적인 개체를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참다운 사물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플라톤도 인간의 철학적 사고의 참다운 모습은 바로 구체적인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에서 볼 수 있으며,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것이라고 했다. – p. 203.

희랍 신화는 원시 신화가 아니며 가장 발달된 신화이다. 그리고 아름답게 다듬어진 신화이다. (…) 희랍 신화는 가장 내용이 풍부하고 조리 있는 신화임에 틀림없다. 비단 하늘, 땅, 산, 바다, 숲, 내, 별, 태양, 밤, 낮 등이 그 속에서 신의 이름으로 불릴 뿐 아니라 인간 사회와 인간 능력의 여러 요인, 즉 정의, 평화, 질투, 사랑 등도 그 속에 포함되어 신의 이름으로 불린다. 신들은 일정한 직분을 갖고 인간과 우주를 돌보는 일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 p. 214.

탈레스에게는 신화와 구별된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관이 뚜렷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가 우주 공간에서 쌓아올린 풍부한 경험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일찍이 헤카타이오스는 배를 타고 돌아다니며 신화에 나오는 땅이 과연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검증함으로써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했는데 이러한 실증적 사상은 탈레스에도 마찬가지이다. – p. 216.

파르메니데스는 철학에 논리적인 사고를 도입하여 경험적인 것과 초경험적인 것을 구별하고 존재의 세계와 생성의 세계를 엄밀히 구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서양의 존재론의 제일보를 내디뎠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존재의 세계와 생성의 세계의 구분은 플라톤 철학이 성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논리적 사고 및 연역적 사고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적 사고가 갖다준 선물일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 존재란 실재, 또는 진상이란 뜻이다.그에 의하면 존재 개념의 정의에서 그 자신의 무는 있을 수 없으며 존재 자체는 필연적인 것임이 연역된다. 그리고 존재 자체를 파악하는 것은 사유noein 또는 이성logos이며 무가 아닌 존재 자체는 충만성을 지니며 말하자면 구와 같은 한계성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무와 대비된 존재의 규정성은 자체성과 충만성이다. 존재 자체가 내용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해서 그는 그것이 엉켜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것은 일자인 까닭에 분간하는 인간의 사고를 넘어서 있으며 나중에 부정 신학의 뿌리가 된다. 이와 반대로 생성의 세계는 감각에 주어지는 세계이며 억견의 세계인데 밤과 낮, 차거움과 더움처럼 두 가지 형태로 분열되어서 나타난다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분간하는 사람의 인식 능력에 대응한다. – p.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