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미치 도모노부(今道友信), 이영미 옮김, «단테 신곡 강의», 안티쿠스, 2008.
원제: ダンテ『神曲』講義 (2004년)
‘클래식(classic)’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형용사이며 처음부터 ‘고전적’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다. ‘클라시쿠스’는 사실 ‘함대(艦隊)’라는 의미를 가진 ‘클라시스(classis)’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 ‘클라시쿠스’라는 형용사는 로마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국가를 위해 군함을, 그것도 한 척이 아니라 함대(클라시스)를 기부할 수 있는 부호를 뜻하는 말로,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가리켰다. (…) 인간은 언제든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러한 인생의 위기에 당면했을 때, 정신적인 힘을 주는 책이나 작품을 가리켜 ‘클래식’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 일본에서는 ‘클라시스’에서 유래한 ‘클래식’을 ‘고전’이라 번역한다. 이는 오래전부터 소중하게 여겨온 서적(典), 요컨대 고전이 그러한 교화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클래식’의 번역어로 선택된 것이다. ‘典’은 상형문자로 (…) 다리가 달린 책상 위에 옛 책의 형태인 두루마리를 소중히 올려놓는 것을 의미한다.책상 위에 올려 둔다는 것은 ‘읽지 않고 쌓아 두기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고 늘 열심히 읽는다는 뜻이다. – p. 14.
동서양 구별 없이 인류의 지적 유산의 하나를 공부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의식해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온고지신’,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아는 일이다.《신곡》은 오래된 작품임에 분명하나,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틀림없이 개개인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 있는 것들을 길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 p. 20.
아킬레우스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죽일 수도 있는 프리아모스에게 “알겠습니다. 돌려드리죠.”라고 말하고 시체를 건넸다. (…) 격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적의 성주의 목만 자르면 승리를 움켜쥘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식의 시체를 찾고 싶다는 적군의 왕의 청을 듣고 시체를 돌려주고 장례까지 허락한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의 영웅이라 일컬어진다. 그리스 인은 단지 강하기만 한 사람이 영웅이 아니라 인간의 아픔을 알아야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호메로스는 표현한 것이다. – p. 35.
인간의 고귀함과 나약함을 두루 겸비한 인간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약함을 보면서 공감하고, 고귀함을 통해서 동경을 불러일으킵니다. – p. 69.
나는 도쿄 출신이니 그야말로 고향 토박이로 살아가는 셈이지만, 번잡한 이 땅에 살며 일하다 보면 고향에 대한 애틋한 염원을 가져 보려 애써도 도무지 그런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가야 할 그곳은 경우에 따라서는 지구상의 한 점일지도 모르지만, 정신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 단테는 태어난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후,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의 마음이 진정으로 동경했던 장소로 정신을 향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천국이었다. – p. 85.
단테는 인간적인 갖가지 욕망, 야심에 무릎을 꿇고, 타락한 생활에 빠질 뻔했던 적도 있다. 서른다섯이 지나면서 권력도 쥐었고, 주위에서는 단테의 말을 들었다. 갖가지 유혹들이 신변에 생겨났다. 그러한 때, 타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선택되어 피렌체를 더 낫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자부, 시인으로서의 자부, 이런 것들을 떠올리면, 시성 베르길리우스처럼 자긍심 높게 그리고 훌륭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 p. 174.
나를 거쳐서 고통스런 마을로 가고
나를 거쳐서 영원한 고통 속으로 가며
나를 거쳐서 저주받은 무리 속으로 간다.
정의는 지존이신 나의 창조주를 움직이시어
성스런 힘, 최고의 지혜와
태초의 사랑으로 하여금 나를 이루셨도다.
나보다 먼저 창조된 것이란 영원한 것 이외엔
없으니, 나는 영원토록 남아 있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지어다.
- 단테 알레기에리(지음), 한형곤(옮김), «신곡», 서해문집, 2007. p. 59.
단테는 이 9행으로 그때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지옥의 정의를 시적으로 표현했다. ‘지옥이란 일체의 바람, 희망이 없는 곳이다.’ 그러한 지옥이 우리의 지면과 같은 높이의 땅에 문을 세웠다. 그리고 우리는 지옥문 밖에 모든 희망을 남겨 두어야만 한다. 지옥이란 절망의 장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정말로 절망한다면 그것이 바로 생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하로 떨어지지 않아도 관계없다. 단테 생각으로는 모든 희망을 남겨 두고 들어가는 것이 지옥이다. (…) 여러 번 반복해 낭송하다 보면, 지옥문이 말하는 ‘나’가 암송하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만났던 사람을 내 말이나 행위로 고뇌의 도시로 보낸 일은 없었을까. 남에게 좌절을 안겨 준 일은 없었을까. – 이마미치, pp. 188-191.
무릇, ‘해석’은 ‘의미 부여’와는 다르다. 의미 부여는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작품에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해석’이라 칭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오만한 생각이다. (…) ‘ 의미 부여’와 ‘의미 발견’은 그 차이를 자연과학 실험처럼 확연하게 드러낼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단테가 ‘지옥은 정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맨 처음에 썼던 말을 마음 깊이 새겨 두면, 우리가 단테의 지옥을 통해 무엇을 발견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하는 갈피를 잡을 수 잇다. 단테의 지옥도는 ‘지옥을 통해 신의 정의를 깨우치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 우리가 고전을 접할 때 중요한 자세는 ‘의미 부여’가 아니라 ‘의미 발견’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p. 281.
연옥에는 혼이 씻길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어쩌면 천국에 갈 수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희망이 있다는 점이 지옥과는 완전히 다르다. (…) 연옥에는 별이 보인다. 그리고 이 별은 서양 문학 속에서는 적어도 네 가지 의미가 있다. (…) 별은 이상의 네 가지 정신적인 힘 – ‘목표,길잡이’, ‘희망’, ‘이상’, ‘동경,사랑’ – 의 상징으로 일컬어져 왔다.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세계가 지옥이다. (…) 별을 보며 잃어버렸던 이상에 대한 동경을 떠올리고 ‘좀 더 훌륭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연옥의 행위와 같다. – p. 300, p. 310.
전례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나 자신의 죽음도 생각해 봐야 한다.’ ‘저 사람에게는 정말로 신세를 많이 졌다. 부디 천국에 가길 바란다’라고 한순간만이라도 진지하게 기원한다면 그 사람은 그 순간만큼은 대지로부터 벗어난다. 전례가 가지는 종교적 분위기는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단테가 말하는 ‘땅에 처박혀’ 있는 데에서 인간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하는 일이다. – p. 352.
연옥 안에서는 단순히 자기가 과거에 무엇을 했던가를 반성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영어로 말하면, 평범한 반성은 what I did ‘내가 했던 것’을 돌이켜보는 일이다. 그것은 그에 대한 보완을 하면 끝나 버린다. 만약 남에게 맡았던 소중한 물건을 실수로 잃어버렸다면 똑같은 물건을 사 주면 그걸로 끝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what I did 와 관련한 의식만으로는 깊은 반성이 될 수 없다. 그게 아니라 what I was ‘나는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고, 그리고 who I am ‘나는 어떠한 인간인가’, ‘나는 과연 어떠한 인간인가, 나는 누군인가’ 라는 자기 페르소나를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 389.
단테는 이제 자기 발걸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자 마치 시험과도 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다. 그 젊은 여인은 단테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름다운 꽃을 따면서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데 그 모습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고 만다. 스승이 곁에 있긴 하지만 스승의 안내로부터 벗어나 독립의 걸음을 시작하는 일의 어려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때처럼 훤히 보이는 길로 걸어가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걸어가야 할 길을 정하고 이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속해야 하는 일의 어려움이 표현되어 있는 건 아닐까. – p. 411.
인간은 신의 무한한 사랑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되었다. 이 점을 잊지 말고 살아가자. – p. 587.
** 어둠 속에 처한 이에게 등불이 돼 주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