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인문 고전 강의», 라티오, 2010.

우리는 고전을 읽을 때 그것이 인간 자신과 그의 삶의 근본을 파고든 텍스트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세계를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 점은 ‘인문학’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는 문사철(文史哲)의 성격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 p. 13

우리가 고전을 읽을 때에는 우선 말의 뜻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독서가 완결될 수 없습니다. 텍스트가 만들어진 시대의 맥락도 함께 살펴보아야 하고 더 나아가 그 텍스트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세지가 무엇인지도 궁리해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 자체, 텍스트의 맥락 즉 콘텍스트, 그리고 그것들을 읽고 있는 우리 자신과 우리 시대, 이렇게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고전을 읽는 것은 고전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고전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은 스승의 말에 귀기울이듯이 읽는 것입니다. 고전은 입이 무거운 스승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캐묻지 않으면 속뜻을 쉽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전을 읽을 때 사소해 보이는 구절이나 표현이라 해도 무겁게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p. 15

여기서 우리는 서사시의 기본 작법을 알 수 있습니다. 서사시는 구구절절 마디마디 모든 사건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시인이 생각하기에 중요한 사건만을 골라서 쓰는 겁니다. 우리도 서사시의 구조와 작법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건의 핵심을 잡아내어 그것을 중심으로 서술하기, 이것은 모든 글쓰기에서 기본이 되는 방식입니다. – p. 23

우리는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고전에 대한 정의를 하나 내릴 수 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중략)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냐 아니냐의 가치 판단을 하기 전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서술하는 것, ‘있음’에 대한 철저한 의식, 이것이 고대 희랍의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 59

아킬레우스의 변화과정을 지켜보면 사람이 성숙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숙을 위해서 무엇이 요구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친구에 대한 우정, 공동체에 대한 헌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태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찰, 이 모든 것이 사람을 성숙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과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 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킬레우스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거듭 말하지만《일리아스》는 단순히 트로이아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서사사는 아카이오이족과 트로이아인들의 전쟁을 얘기할 뿐만 아니라 아킬레우스의 인격형성 과정을 보여주고, 성숙해진 아킬레우스와 나이 든 프리아모스의 대화를 통해 인생의 온갖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p. 68

아킬레우스는 장렬하게 죽음으로써 불멸의 명예를 얻습니다. 즉 죽어야 불멸하는 것입니다. 구차하게 살아남으면 불멸할 수 없습니다. 기묘한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습니다. – p. 84

희랍의 서사시는 필멸하는 인간의 한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데 반해, 단테의 서사시는 인간의 의지와 신의 사랑으로 불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p. 85

이렇게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좋은 것들은 위계질서가 있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덜 좋은 것과 더 좋은 것의 구별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다보면 ‘가장 좋은 것’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 p. 156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적이라면 제대로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대로”는 “중용”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성격적 탁월성을 가졌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판단하려면 그가 중용의 태도를 취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중용은 산술적으로 딱 가운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뭐든 중간만 하면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 적절한 것을 취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 p. 165

안셀무스는 공식적인 교리를 대변하고 아벨라르두스는 학문적 기독교를 대변합니다. 반면 베르나르두스는 구도자적 삶을 대변합니다. 이러한 베르나르두스가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단테를 신 앞으로 안내합니다. – p. 198

이 여행을 수행하는 과정, 더 나아가 구원을 얻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훌륭한 말”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단테 스스로 위대한 서사시를 쓰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서사시를 쓰는 것이 자기 본분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은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다짐할지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훌륭한 말”을 지우고 그 자리에 무엇을 넣을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대답이 간단치 않은 물음입니다. 한순간의 행복감을 좇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서 평생에 걸쳐 해야 하는 일을 성취했을 때 –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eudaimonia)이기도 합니다 –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어야겠습니까? – p. 209

천국으로 가는 길은 구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동시에 서사시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출발점은 스승의 말입니다. “훌륭한 말”입니다. 훌륭한 말을 듣고 자신도 훌륭한 말을 쓰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훌륭한 말을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말의 힘입니다. 말이 권위를 잃어버리면 폭력이 나옵니다. 혹은 훌륭하지 않는 말,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먹어치우는 사람이 권세를 쥐면 세상이 흉흉해집니다. 공자도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 즉 교언을 가장 질책했습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입니다. – p. 211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입니다. 전지는 지성의 측면이고, 전능은 의지의 측면입니다. 이 두 측면을 묶으면 넓은 의미의 지혜가 됩니다. 관조하려는 에로스는 가장 높은 단계의 열망입니다. – p. 222

단테는 천사를 만나지만 베버는 악마를 만납니다. 베버에게 악마와 만날 것을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마키아벨리입니다. – p. 287

고대의 저술가들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얘기했다면, 마키아벨리 자신은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중략)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정치는 당위적 이상에 따라서 하는 게 아니라 “상황의 필요에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 p. 307

공자의 사상은 정치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역사에서 끝납니다. – p. 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