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길더러스(Mark T. Gilderhus), 강유원·이재만 옮김, «역사와 역사가들», 이론과실천, 2009.
역사가는 겸손한 실천가로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일시적인 것으로, 십중팔구 미래에 수정되거나 거부될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동시에 그들은 탐구에서 기쁨을 찾아야 하고, 때로는 자신이 유용하고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대다수 역사가는 역사 연구를 인간이 자기인식을 획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여긴다. (…) 기번의 서술은 비참하고 음울한 사태를 가리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적 탐구를 통해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는 인식을 통해서만 과거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 p.16
우리의 역사관과 한층 더 일치하는 역사관은, 고대 세계에서 우상 파괴자들이 전통적인 구술 서술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자고 역설했을 때 발전해 나왔다. 희랍에서는 일찍이 서기전 5세기 초에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인에 맞선 희랍인의 전쟁에 관한 ‘진실’을 저술함으로써 서구 전통에서 최초로 ‘비판적 역사’를 선보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목격자의 서술, 국가의 공식 기록, 그리고 자신의 관찰과 같은 입증 가능한 정보를 사용했다. (…) 헤로도토스 이래로 역사가들은 인간의 과거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를 말하려고 노력해왔다. – p.19
로빈 콜링우드는 인간에게는 타고난 본성이 없다고 즐겨 말했다. 인간은 다만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유연한 창조물인 인간은 무엇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다. (…) 역사적 경험은 중요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모양짓는다. – p.22
아테네인 투키디데스는 서기전 5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 간에 벌어졌던 전투에 관한 서술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다. 투키디데스는 이 전투에 장군으로 참전했고, 아테네인들 사이에 퍼진 무시무시한 전염병에 걸려 고생했으며 자신의 책에 그 공포를 생생히 기술했다. 그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아테네에서 강제로 추방당한 뒤, 저술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며 20년을 보냈다. – p.38
로마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정치적, 군사적 주제에 관해 몇 권을 저술했다. (…) 그의 주요한 주제는 정치적 폭정의 증대와 로마적 덕의 쇠퇴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 그는 약 18세기 후에 액튼 경이 말했던,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며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견해를 벌써 가지고 있었다. – p.42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이원론을 체계 원리로 정립했다. (…) 유대인의 개념에서 유래한 그의 시간감각은 희랍의 원운동 관념을 명백히 거부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끝없는 회전과 덧없는 반복은 사실상 신의 영향력과 의도를 수포로 돌려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는 천지창조라는 분명한 시작, 중간 그리고 끝을 가진 선을 따라 역사가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 p.46
근대에 역사가들은, 학적 탐구의 다른 영역들을 연구하는 대다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궁극적 혹은 최종적 원인을 결정하려는 시도, 곧 역사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에서 신의 역할을 결정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 마키아벨리에게 역사란 자신의 처세술을 조명하기 위한 일종의 사례 모음집이었다. – pp. 59-62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처럼 과학적 방법을 훈련한 철학자들은 수학적 공식화야말로 정확성과 확실성의 핵심이라 여겼다. (…) 장 보댕은 (…) 모든 국가의 법과 관습을 비교하고 대조하여 새로운 종류의 보편사를 창조하고자 했다. (…) 볼테르, 데이비드 흄, 그리고 에드워드 기번은 종교를 인간의 진보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묘사하여 종교의 역할을 비하했다. (…) 계몽주의 시대 역사가들은 역사적 행위자들의 행위를 행위자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발전과 맥락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감각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시대의 인식에 갇혀 자신들의 가치와 열망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인간이 얻으려 애쓸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여겼다. 그 결과 그들은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로의 일탈을 탈선 혹은 어리석은 시도로 여기곤 하였다. 콜링우드가 날카롭게 지적하였듯이, “계몽주의의 역사적 견해는 (…) 반역사적”이었다. (…) 그리하여 학자들은 참여자들이 과거를 경험했던 대로 과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판단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연관된 문제가 기록 연구를 충분히 수행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에서 비롯되었다. – pp. 66-71
콜링우드는 역사를 “인간 본성에 관한 학문”이라고 기술했으며, 그 목적은 ‘자기인식’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했다. (…)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탐구하는 역사가는 사건의 바깥쪽이라 불릴 만한 것과 안쪽이라 불릴 만한 것을 구별한다.” 그는 이 표현으로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을 정립했다. 콜링우드가 “사건의 바깥쪽”이라는 말로 의미했던 바는 “신체와 그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될 수 잇는, 사건에 속한 모든 것으로, 카이사르가 일군의 남자들과 함께 특정한 날에 루비콘이라 불리는 강을 건넌 것, 혹은 그가 다른 날에 원로원 회랑 바닥에 피를 흘린 것”이었다. 콜링우드가 “사건의 안쪽”이라는 말로 의미했던 바는, “사유라는 관점에서만 기술될 수 있는 것으로, 공화국의 법에 대한 카이사르의 저항, 혹은 카이사르와 그의 암살단 사이에 공화국의 앞날을 둘러싸고 일어난 충돌”이었다. (…) 어떻게 역사가는 인간들이 행동으로 드러낸 사유를 확실히 알 수 있는가? 콜링우드에 따르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 사유를 자기 자신의 정신 속에서 재사유하는 것이다.” – pp.137-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