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프-베른하르트 에시히(Rolf-bernhard Essig), 배수아 옮김, «글쓰기의 기쁨», 주니어김영사, 2010.
…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창작이란 결코 무에서 창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창작이란 혼돈의 산물이다. 일단 창작에는 원료가 있어야만 한다. 창작이란 모양도 없고 희미하기 만한 그것에 형체를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 창작이란 원료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문장으로 다듬는 능력도 필요하다. – p. 61
“…어떤 형상에게 생명을 부여하려면 커다란 대가를 감수해야만 한다. 내 정신의 피조물인 여섯 명은 일단 주인공으로 태어나게 되면 내가 정해 주는 삶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존재를 없애 버릴 힘을 잃게 된다.” – p. 75
졸라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건물과 집의 실내도까지 스케치했다. 그래서 누가 누구의 옆집에 살고, 어느 집이 부부싸움을 할 때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위치인지를 사실적으로 분명히 했다. – p. 131
호머의 <<일리아드>>에는 트로이 전쟁 도중 필라이메네스가 죽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어느새 다시 등장해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시체를 찾아다닌다. ···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주인공에게 매제가 한 명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실제로 매제를 갖게 되는 시점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다음이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희곡 <돈 카를로스>에서 돈 카를로스가 여왕의 편지를 여덟 달이나 지니고 다녔다고 썼다. 그런데 그 대목 앞에는 ‘그녀에게서 받은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 p. 129
어떤 작가는 과학자들이 그러듯이 연구하고, 어떤 작가는 기자처럼 조사한다.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는 19세기에 <<루공마카르>>라는 20권짜리 연작 소설을 썼다. ··· 그 중에서 한 권은 제목이 <<제르미날>>로, 프랑스 북부 광산 노동자들의 일상을 테마로 한 것이다. ··· 직접 그곳으로 가서 자세히 관찰하고 광산 노동자들과 만나 대화도 나누었다. ··· 그들과 함께 싸늘하고 축축한 지하갱도 깊은 곳까지 내려가 보기도 했다. 그렇게 최소 몇 달 동안 곤궁하고 고단한 광부들의 삶을 체험했으며, 그들이 노예나 동물처럼 대우받는 광경도 목격했다. 소설 <<인간 안의 짐승>>을 쓸 때도 철도 노동자들의 일상을 그런 식으로 조사했다. 그는 항상 그렇게 글을 썼다. – p. 145
졸라가 선택한 글쓰기는 사실주의적 작법이긴 하지만, 그는 사실의 전달뿐만 아니라 ··· 근본 바탕으로는 진실의 편에 서려고 했으므로 과장이란 수법을 굳이 피하지는 않았다. – p. 147.
현실의 삶을 쓰되 현실적으로 보이도록 써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어떤 사건이 정말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대로 쓴다면, 신빙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 작가는 사실주의적으로 쓰려 한다. 그런데 사실에 신빙성을 입히려면 현실을 변형해야만 하다니, 그건 모순이 아닌가. 이 점에 대해 해명하기는 간단하지 않다. – p. 150
독자들은 범인이 누구이며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게 되지만, 이 작품에서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냉혈>>은 범죄의 해결과 범인의 체포가 주제가 되는 추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커포티가 주력하는 것은 풍부한 디테일, 등장인물의 다양함, 미국 지방 소도시의 소름끼치는 초상화이다. – p. 15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한 강연회에서 이렇게 겸손하게 표현했다. “나는 책을 쓸 용기까지 냈던 사람이지만, 그래도 내가 쓴 것들은 내가 읽은 글들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해서 읽을 수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죠. 자신의 능력이 허용하는 글을 쓸 수 있을 뿐입니다.” – p. 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