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부 아키라(柳父章), 서혜영 옮김, «번역어 성립 사정», 일빛, 2004.

원제: 飜譯語成立事情

···’사회’ ‘개인’ ‘근대’ 등의 번역어는 학문과 사상의 기본 용어이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나 신문지면 등에도 자주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도 가정의 거실에서 가족들끼리 또는 직장 동료들끼리 편하게 대화를 할 때에는, 이런 말은 보통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의 학문과 사상의 기본 용어가 일상어와 따로 놀면서 이 책 곳곳에서 지적한 바 여러 가지 왜곡이 따르게 되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다른 면에서 보면, 번역어가 일상어와 동떨어져 있는 덕에 근대 이후 서구 문명의 학문과 사상 등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던 측면도 있다. – p. 5

society라는 말은 매우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 첫째 society에 해당하는 말이 일본어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당하는 말이 없었다는 것은 일본에 society에 대응할 만한 현실이 없었다는 것과 같다. – p. 14

번역어는 선진 문명을 배후로 갖는 상등(上等)의 바다 건너에서 온 말이며, 같은 의미의 일상어와 대비해볼 때 더 상등이고 더 고급이라는 막연한 어감이 있었다. – p. 31

하나의 말에 좋다, 나쁘다 식으로 색깔이나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일본에서의 번역어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인용한 것은 지금부터 벌써 40년 전의 이야기인데, 기본적인 사정은 오늘날도 그리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역시 ‘근대’란 ‘혼란’이며 ‘지옥’이라는 의견 또는 ‘근대’란 ‘뭔가 매우 위대하다’고 하는 의견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처럼 말에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식으로 가치가 부여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말이 인간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이 사람을 부리는 것이다··· 나는 번역어를 단지 말의 문제로만 보고 사전적인 의미만을 쫓기보다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보고 싶고, 문화적인 요소로서의 의미를 추구하고 싶다. 특히 말이 어떻게 인간을 움직이고 있는지가 관심사다. – p. 55

···와츠지 테츠로는 ‘존(存)’과 ‘재(在)’를 조합하여 만든 ‘존재’라는 말은 인간 자신의 본연의 모습에 대한 적합한 표현이라고 했다···’존’은 인간 주체의 행동으로서, ‘시간적 추이와 더불어 있다’라는 뜻을 갖는다. ‘재’는···’공간적·사회적으로 있다’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자가 인간 관계 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존재라는 표현은 인간의 주체적이고 시간적이며 장소적인 본연의 모습을 나타내는 데 적합하다는 것이다. – p. 112

한자 중심의 표현은 번역에는 이로웠을지 몰라도 학문과 사상 등의 분야에서 일본 고유의 야마토 말, 즉 전래의 일상어 표현을 잘라 버려왔다는 것이다. 그런 탓에 가령 일본의 철학은 우리들의 일상에 살아 있는 의미를 포섭하지 못했다. 이것은 지금부터 350년쯤 전에 라틴어가 아니라 굳이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쓴 데카르트의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며, 나아가 소크라테스 이래의 서구 철학의 기본적 태도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 p. 123

당시 이 자유라는 말은 하나의 유행어로서 사람들은 그 의미도 잘 모르면서 아무 데나 쓰는 형편이었다 ··· 우리는 ‘자유’라는 말은 바르게 이해하면 좋은 뜻이 되고 잘못 이해하면 나쁜 뜻이 된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기 쉽지만 ··· 문제는 이해의 방법이 아니다. 모국어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역사 깊은 말은 ‘오인’될 리 없다. 따라서 ‘오인’된 ‘자유’는 번역어 ‘자유’이다. – p.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