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서]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살림, 2013.

   <차례>

   - 디지털 매체의 특성
   - 디지털 매체의 사용자
   - 디지털 매체와 인문교양
   - 정보를 지식으로 바꾸기
   - 글쓰기의 기본 원칙
   - 디지털 매체와 글쓰기
   - 매체별 글쓰기 전략
   - 문서의 신뢰도 높이기

이 책의 주제는 디지털 매체를 잘 파악해 매체 특성에 맞게 글을 쓰자는 것이며, 좋은 글을 판별하는 눈 밝은 독자가 되고 좋은 글을 쓰는 믿을 만한 저자가 되려면, 출처를 정확히 따져 묻는 태도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함을 명심하자는 것이다.

사회학의 한 분야인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은 인간 행위 사이를 잇는 여러 비인간 행위자에 주목한다. 비인간 행위자라는 용어가 딱딱하게 느껴지면 의미 전달에 관여하는 여러 물건이나 기능이라고 이해해도 괜찮다. 그렇다 하여 좋은 의도로 만든 제품이 인간에게 꼭 좋은 영향을 끼치리라는 보장은 없다. 식품 회사 알미르 프로덕츠는 1983년에 치약처럼 짜서 먹는 터블껌(Tubble Gum)을 출시해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터블껌에 길들여진 유아들이 치약이나 연고, 접착제처럼 튜브에 담긴 것을 마구 짜 먹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튜브형 껌이라는 제품 형식이 만든 사람의 의도나 목적에서 벗어나 비인간 행위자가 되어 어린이들의 습관을 바꾼 것이다.

인간 행위자와 마찬가지로, 비인간 행위자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 디지털 매체로 의사소통을 하려면 흔히 ‘인터페이스’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여러 비인간 행위자와 접촉해야 한다. 우리는 컴퓨터나 모바일 기기, 입력 화면, 출력 화면, 응용 프로그램(익스플로러, 사파리, 아래한글, MS워드 등), 메뉴 (즐겨찾기, 공유하기, 저장하기, 리트윗, 좋아요 등), 문자, 이모티콘, 도표, 사진, 동화상, 자동 음성 안내, 링크 등 수없는 비인간 행위자를 활용한다. ‘디스플레이 장치’라는 비인간 행위자는 현대인의 자료 검토 방식을 ‘읽기’에서 ‘보기’로, 그리고 ‘보기’에서 ‘훑기’로 변화시켰으며, 그러한 변화는 140자 입력 제한을 둔 트위터의 인기로 확인되었다.

비인간 행위자가 스스로 행위 능력을 발휘한다 해도 디지털 매체의 사용자가 적극적으로 관여하면 그 가능성은 축소될 것이다. 계간 「액트온(ActOn)」은 창간 특집으로 “비밀은 보관하지 않는 것이 보호하는 것이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인터넷 공간의 사생활 침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보안장치’와 ‘암호기술’이라는 비인간 행위자를 개발하는 일에 몰두하기보다 애초에 보안장치가 필요없게 만드는 인간 행위자의 발상 전환과 신중한 선택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디어 비평가 셰리 터클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인터넷상에서 ‘삭제하다’ 와 ‘지우다’란 단어들이 은유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데 한 세대가 걸렸다. 파일, 사진, 메일, 검색 내역 은 그저 눈앞에서만 제거된다.” 누가 언제 어떤 경로로 자기 글을 읽을지 알 수 없다면 문제 소지가 될 만한 것을 되도록 제거하면서 방어적으로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의 개념 중에 ‘의무 통과점’이란 게 있다.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려면 ‘번역’이라는 의무 통과점을 지나야 한다. 번역은 외국어 번역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남의 말을 자기 방식으로 이해하는 모든 과정을 가리키는데, 더 치밀하게 규정하자면, 번역이란 출발어와 도착어의 격을 같게 만들어 정보 발신자와 정보 수신자 사이의 의사소통을 오해 없이 완수하는 일이다. 한 사람의 표현과 다른 사람의 이해 사이에 반드시 번역 과정이 들어간다. 우리가 디지털 기기를 매개로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하려면 번역 과정의 의무 통과점을 잘 설정하면 된다. 번역 과정에 필요한 두 가지 의무 통과점은 ‘출발어의 맥락을 파악하는 일’과 ‘도착어의 맥락을 파악하는 일’이다. 의사소통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첫째, 내용의 출처를 제대로 확인하고, 둘째, 독자 상황에 맞게 그 내용을 다듬어 보내야 한다. 정보 수신자가 사용하는 휴대전화의 종류를 고려하지 않고, 당연히 스마트폰을 쓰겠거니 대충 짐작해 자기 스마트폰에 저장된 고해상도 사진이나 동영상을 첨부해 보낸다면 의무 통과점을 지나지 않고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격이다. 의무 통과점을 거쳐 의사소통을 시도하면 오해 소지는 줄어들고, 이해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깐깐하게 따지자면 번역 과정에서 출발어 맥락 파악이 도착어 맥락 파악보다 더 중요한 의무 통과점이다. 원정보가 충실해야 이해도 쉽고, 적절한 해석도 나오기 때문이다. 출발어 맥락을 파악하는 일은 정보 출처를 제대로 확인하는 일이며, 이 책에서 내가 줄곧 주장하는 바도 이것이다.

출처를 따져 묻는 습관은 네트워크에 소문 대신 정보가 퍼지도록 만들며, 의견 대신 지식이 전파되도록 만든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자료는 원래 맥락과 동떨어진 채 주관적으로 소비되기 십상이며 온갖 오해를 일으킨다. 디지털 문서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내가 제안하는 기준은 단순하다. “출처가 정확한 자료만 믿어라.” 출처가 뚜렷한 글을 읽은 독자는 그 글을 디딤돌 삼아 믿을 만한 정보, 좋은 필자를 스스로 찾아 나선다. 좋지 않은 글은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거나 거짓 정보를 전파하도록 만든다. 출처 표기 원칙은 다음과 같다. ‘인용 출처만 보고서도 독자가 원문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표기할 것.’ 인터넷이 사이버 공간이 아니듯 디지털 정체성은 따로 있지 않다. 블로그나 SNS에서 대한민국의 기형적 유통 구조와 배송 속도 경쟁을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은 오전에 주문한 제품을 오후에 가져다 주는 ‘총알’ 배송 서비스를 이용한다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정체성이 쪼개질 것이다. 온라인의 자기 모습과 오프라인의 모습이 다를수록 좋은 글을 쓸 확률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지행합일은 고리타분한 옛 사람들의 덕목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실용 ‘매뉴얼’ 첫 장에 나와야 할 항목이다. 지행합일에 이르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줄곧 두 가지를 제안하고 강조했다. 첫째, 출처를 정확히 표기하자. 둘째, 그 일을 한결같이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