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문, «안중근 평전», 한겨레출판, 2012.
안중근이 자신의 삶을 직접 서술한 <안응칠역사>에서 가장 상세하게 언급한 것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부분이었다. [···] 하얼빈역이나 뤼순 감옥, 그리고 법정에서 보여준 태도를 유심히 살펴본다면,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성자’를 지향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하다. – 14쪽
영웅이나 성자 이전에 안중근은 한 사람의 인간이다. 인간은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기도 하며, 때로는 성격적인 결함을 갖기도 한다. 안중근 또한 한 사람의 인간인 이상, 그에게도 ‘인간적인 약점’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16쪽
나라가 망해 자결을 결심한 후 절명시를 써놓고도 입에서 약 떼기를 세 번이나 했다고 고백한 매천 황현의 일화는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인간인 이상 누구에게나 죽음은 쉽지 않는 일이며, 따라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 17쪽
안중근에게 세례를 준 인물은 빌렘(1860~1938) 신부이다. 홍석구라는 한국식 이름을 가진 그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 지대인 알자스로렌의 슈파이헤른에서 태어났다. / 알자스로렌이라는 지역은 특별한 곳이다. 이곳은 원래 프랑스령이었는데 보불전쟁을 거친 1871년 독일제국에 병합되었고, 1919년에는 베르사유회담을 통해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그러면서도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지역이었다. 알퐁드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1871)에는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의 슬픈 광경이 묘사되어 있지만, 사실은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힙겹게 지켜야 했던 매우 슬픈 역사를 가진 땅이다. – 85쪽
“이듬해(1909년) 정월 나는 노보키예프스키 방면으로 돌아왔다. 동지 12인과 상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오늘 우리가 손가락을 끊어 함께 맹세함으로써 그 자취를 보인 이후에 한마음으로 단체를 이루어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고 기필코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소? 모두가 응낙하여 따랐다. 이에 열두 사람이 각각 왼손 약지를 끊어, 그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의 네 글자를 크게 썼다. 쓰기를 마치고서는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였고, 그 뒤에 천지에 맹세하고는 흩어졌다. – 224쪽
“‘어느 시점에 저격하면 좋을까?’ 거듭 헤아려보아도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토가 기차에서 내렸다. 군대의 경례와 군악 소리가 하늘을 가르고 내 귀에 흘러들었다. 그 순간 분기가 갑자기 일어나고 3천 길 업화가 뇌리에서 치솟았다.” – 275쪽
안중근이 자진해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된 것은 원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 될 수 있는 대로 생금되어서 우리의 정정당당한 이유를 발표하면서 우리나라의 억울한 사정을 여러 외국에 선전할 것 [···] 등을 계획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 2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