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애덤 스미스(Adam Smith), 박세일·민경국 옮김, «도덕감정론», 비봉출판사, 2009(1996).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해도 인간에겐 연민(pity)과 동정심(compassion)처럼 그것과 상반되는 본성도 있다. 상상을 하면서, 고통을 받는 자와 입장을 바꿔 봄으로써 우리는 고통 받는 자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것을 느끼거나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고통이나 비애를 일으키는 상황만이 우리의 동류의식(fellow-feeling)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모든 격정에 대하여 이 동류의식을 동감(sympathy)이라고 표현하더라도 그다지 부적절할 것 같진 않다. 동감은 격정을 목격함으로써 생긴다기보다 그 격정을 야기한 상황을 목격함으로써 생긴다.

우리는 고인에 대해서도 동감한다. 그들을 기념하고 공허하게 경의를 바치며, 우리는 비통해 하고 그들의 불행에 대한 슬픈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려고 애쓴다. 인생의 중요한 원리 중 하나가 여기에서 기인하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한편으로는 개인을 괴롭히고 억누르는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를 보위하고 보호해 주는 역할도 한다. 동감의 결여는 고통의 한 원인 같다. 우리는 유쾌한 감정 나눌 때보다는 불쾌에 대한 동감을 나눌 때 훨씬 큰 만족을 얻는다. 친구 간의 우정은 기쁨을 나눌 때보다 분개를 나눌 때 훨씬 돈독해진다.

동감의 기초인 역지사지 태도는 일시적이다. 방관자의 동감은 당사자의 비애와 일치하지 않는다. 동감은 관념이라서 실제 느낌을 왜곡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회를 조화롭게 하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점이다. 타인의 공감과 당사자의 감정은 완전히 일치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둘이 조화를 이룰 수는 있으며 한 사회에 필요한 것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당사자 역시 친밀하지 않은 타인이나 집단에게 완전한 공감을 요구할 수 없기에 스스로 감정을 누그러뜨리게 되므로, 낯선 이들과 사교하고 대화하는 건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데 유익하다. 그러니 타인과 더 공감하려는 방관자의 노력과 타인과 공감 가능한 선까지 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당사자의 노력이 사회적인 두 미덕이다. 상냥함이나 자애는 전자에 속하고 절제와 중용은 후자에 속한다. 우리는 천박한 탄식과 끊임없는 한탄으로 동정을 얻으려 큰 소리로 통곡하는 사람에게서 역겨움을 느낀다. 이처럼 타인에 대해서는 많이 느끼고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다. 그래야 비로소 감정(sentiments)과 격정(passions)이 조화를 이루고, 인류는 고상하고 적절하게 삶을 영위하게 된다.

미덕이란 탁월함이며, 비상하고 위대하며 아름다운 것이다. 미덕은 단순한 적정성에 그치지 않는다.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는 것은 적정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미덕은 아니다. 육체에서 비롯하는 만족은 채워지자 마자 사라지는 것들이므로, 절제라 불리는 미덕으로 이런 욕망들을 통제해야 한다. 통증은 사라지는 순간 모든 고뇌에서 당장 풀려나지만 상상에서 나온 격정은 이와 무척 다르다. 예컨대 친구가 무심코 던진 말에 길고 긴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는 자의 고뇌에 대해 동감하지는 않지만 공포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이렇듯 상상은 실제 느끼는 고통이 아닌 우리가 앞으로 겪을지도 모르는 고통을 보여준다. 소포클레스 비극을 보며 우리가 공감하는 건, 필로크테테스의 쓰라린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그가 느꼈을 처절한 고독감이다.

애정에는 관대, 친절, 우애, 존중이 강하게 뒤섞여 있다. 모든 격정 중에 우리는 애정에 최대로 공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애정은 허영의 대상이 되기도 쉽다. 우리가 애정을 품은 사람이나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느 정도 자제와 과묵함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인류의 반이 다른 반과 사이좋은 동반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이 자제와 과묵의 결핍 탓이다.

* 제1부 제2편 제2장까지 요약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