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서] «하룻밤에 읽는 서양사», 페이퍼로드, 2014.

서양사 공부와 인문교양 쌓기

이 책의 목적은 인문교양을 넓히는 것이다. 인문교양을 쌓는 일의 처음과 마지막이 역사 공부다. 역사를 공부하면 실제 벌어진 사건과 사실 자료를 꼼꼼하게 살피는 태도가 몸에 배므로 세계를 더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악법도 법’이라는 구절은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기록한 플라톤의 저작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잘못 알려진 서양 격언은 “의술의 길은 먼데 인생은 짧도다”라는 히포크라테스의 기록이 원본이다. ‘모든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알려진 문구 역시 실제 문헌을 보면 맥락과 뜻이 무척 다르다.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고, 태양왕 루이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역사 공부는 사건의 한쪽만 보려고 하지 않고 다른 측면도 두루 살피는 일이다. 이집트 유적에 고양이 그림이 자주 나오는 건 쥐가 많았기 때문이며 쥐가 파먹을 곡식도 많았다는 점을 넌지시 알려준다. 영국의 아서왕 신화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국민 통합이라는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돈만 밝히는 이들로 치부되는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인류 역사 최초로 유족 연금을 만들어 경제 약자들을 보호한 사회복지 선구자들이기도 하다. 추기경들이 비밀리에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인 콘클라베는 황제가 교황 선출에 아예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서 비롯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구텐베르크 인쇄술 혁명을 알아야 하는데, 금속에 잘 들러붙고 금세 마르는 잉크 기술이 있었기에 그 모든 일이 가능했다는 점까지 알면 역사 공부가 더 흥미로워진다.

역사적 사건에는 촉발 원인과 근본 원인이 있다. 칠레 산호세 광산 붕괴의 촉발 원인은 부실한 갱도 시설이지만 근본 원인은 안전 비용과 인건비를 대폭 줄여서 이윤을 높이고자 했던 자본가의 탐욕과 그것을 방관한 정부의 민영화 정책이다. 1차대전의 촉발 원인이 사라예보 사건이라면 근본 원인은 제국주의 세력의 권력 팽창이다. 주체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주어질 때 그것을 다 쓰고야 마는 것이 인류의 비극 같다.

우리는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인간에겐 때로 얄궂은 운명이 닥치는데, 기원전 49년에 로마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한 로마 장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공화정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찬탈했으나 자신이 죽인 폼페이우스의 동상 앞에서 피살됐다. 강력한 형벌로 사회 안정을 도모했던 법가 사상가 공손앙은 사지를 찢어죽이는 잔인한 형벌인 거열형을 만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거열형으로 죽었다. 옥수수의 고향인 멕시코가 유전자 조작 옥수수에 점령당하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미래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역사 전개의 보편성은 파악 가능하다. 에스파냐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비극과 한국의 작은 마을 노근리에서 벌어진 비극은 본질이 같다. 엘살바도르의 엘모소테 학살 사건은 한국의 제주도 4·3 학살 사건과 무척 흡사하다. 이런 사건은 세계 도처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칠레 시인 네루다는 마추픽추 정상에서 “나는 칠레인이자 페루인이자 아메리카인이다”라고 읊었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공통 유산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인이지만, 근대 사상과 국민국가 체제와 자본주의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유럽인이나 아메리카인과 비슷한 점이 훨씬 많다. 개인이나 집단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인류라는 범주로 보면 대개 비슷하다. 특수성을 알아야 보편성을 파악할 수 있고, 또 보편성을 알아야 특수성도 잘 이해된다. 그 둘의 연관을 조화롭게 살피는 태도가 인문교양이다. 역사라는 관문은 인문교양이라는 목적지로 가기 위한 아주 훌륭하고도 미더운 통로이며, 서양사라는 문은 현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안내자다. 이 책이 그 여정의 동반자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