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이력과 인터넷 활동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어디 낡은 곳이나 망가진 곳이 보이면 보수하고 교체하듯, 고즈넉한 내 리드미파일을 오늘도 여기저기 둘러보며 손을 본다. 10년 전에 쓴 글에서 내가 소개했던 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검색해보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을 새로 알면 10년 전 글에 살을 조금 덧붙여둔다. 적적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이 사소한 일들이 내 일상의 커다란 즐거움이다. 영웅 테세우스가 탔던 배를 후대인들이 오래 보존하기 위해 낡은 부분을 새것으로 계속 교체하다 보니 어느덧 모두 새 부속으로 바뀐 테세우스의 배처럼, 낡거나 미흡한 부분을 더 나은 것으로 교체하고 보수하며 홈페이지를 운영해왔다. 배를 처음 만들었을 때의 재료는 모두 바뀌었고 25년 전과 닮은 모습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25년 전의 홈페이지와 지금의 리드미파일은 서로 다른 게 아니다. 변했지만 변치 않고 그대로인 내 모습처럼.
홈페이지를 처음 만든 건 1996년에서 1997년으로 넘어가던 무렵인데, 영문과 전공 선택 과목이었던 “영어 자료 처리”를 수강하면서 제작 방법을 배웠다. 영어권 문서를 잘 검색하기 위한 기초 인터넷 지식을 배우는 수업이었는데, 인문대 컴퓨터실에서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3.0 브라우저를 사용하며 실습했던 것이 기억난다.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로딩중에 지구로 별똥별이 쏟아진다.
영문 자기 소개가 들어간 웹페이지를 인터넷에 공개하는 것이 이 과목의 기말 과제였고, HTML을 비롯해 기초적인 웹 문서 명령들과 Gopher, ftp 사용법 등이 기말 시험에도 나왔다. index.htm을 ftp로 올리고 나서 영문과 계정으로 접속했을 때 브라우저의 별똥별이 몇 개 떨어지더니 “Welcome to Kangyong’s world!”라는 문구가 딱 보였다. 그때의 희열과 보람을 시간이 지나서도 소중하게 간직했다. 나를 포함한 복학생 몇 명을 빼곤 거의 다 신입생들이었는데 HTML로 직접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과 기술 용어들을 익히는 게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던지 딱 두 명만 A+를 받았다. 그 중 하나가 나다.
첫 이메일 계정인 poetlee@hotmail.com 도 이때 만들었다. poet(시인)와 lee(이강룡)를 합쳐서 poetlee로 만든 것인데 ‘포이트리’라고 읽는다. ‘poetry’(시)와 비슷한 느낌이 나는 점이 맘에 들었다. 나중에 readme라는 새 아이디를 쓰기 전까지 몇 년간 사용했다. readme로 바꾼 때는 시인이 되는 꿈을 접었던 시점과 얼추 맞아떨어진다. 꼭 시인이 돼야 시를 쓸 수 있는 건 아니고 평생 시를 사랑하면 된다고 위로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글쓰기에 시라는 형식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중요한 것은 형식 안에 담긴 메시지와 마음 아닌가.
한동안 서울에서 같이 살았던 웹디자이너 동생한테서 포토샵 4.0을 배웠다. 레이어라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홈페이지에 쓸 간단한 이미지들과 gif 배너도 만들고 했다. 드림위버 같은 웹페이지 제작툴도 좀 배웠지만 별로 쓸모는 없었다. 당시 예술의 전당이 ‘예술 용어 DB 구축 사업’을 진행했는데 문학 용어팀에서 1년간 알바를 했다. 기술적으로 배운 건 없지만, 문학 용어들을 정리하여 입력하면서 자연스럽게 개념 복습하는 시간이 되었고, ‘개념 정리’가 내 홈페이지 정체성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 같다.
새로운 아이디 readme는 ‘나’(me)를 ‘읽어달라’(read)는 뜻으로 만들었다. (나 말고도 ‘이강룡’이라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리드미’도 그러한데, 토론게시판에서 한때 유명했던 ‘인터넷 논객’ 리드미는 내가 아니다. ‘웹칼럼니스트’ 리드미는 나다.) 인터넷한겨레에서 같이 일했던 임선영 선배 추천으로, 국정홍보처의 온라인 국정브리핑에 “리드미의 웹 문화 보기“를 연재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경제적으로 가장 궁핍했던 시절이었지만 연재 기간 내내 무척 즐겁고 행복했다. 웹칼럼니스트가 되는 데 기반을 마련해준 선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다.
아이디를 바꾸면서 홈페이지 이름 역시 ‘리드미파일’로 바꾸었다. 프로그램을 새로 깔면 그 제품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이 담긴 readme 파일(readme.txt)이 동봉돼 있는데 거기서 착안했고, ‘리드미’(readme)가 작성하고 돌보는 글(txt)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지식의 안내자이자 동반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담았다. 공식 이메일 계정은 readme@readme.kr 이지만 readmefile@gmail.com 을 더 자주 쓴다.
1997. 한림대 영문과 서버에 개인 홈페이지 계정 마련, “새내기를 위한 문학과 웹”으로 이름 정함
1998. “새내기를 위한 문학과 웹”, 네띠앙 계정으로 이전
1998. “새내기를 위한 문학과 웹”, 서강대 대학원 서버로 이전
1998. “새내기를 위한 문학과 웹”, 야후!코리아 금주의 추천 사이트 선정, ‘98 올해의 웹사이트 후보
1999. “새내기를 위한 문학과 웹” 통합/개편, 문학 웹진 “웹텍스트”(webtext.co.kr) 개설, 사업자등록
2000. 견우74 김호식 님과 “웹텍스트” 공동 운영
2001. 블로그형 홈페이지 “리드미파일”(readme.or.kr) 개설/개편
2005. “리드미파일”, 블로그어워드 ‘도서’ 부문 올해의 블로그 선정
2006. “리드미파일” 도메인을 readmefile.net으로 변경하고 영어 버전을 한시적으로 동시에 운영
2008. “리드미파일” 도메인을 readme.kr로 변경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청명한 하늘색이 홈페이지 메인 컬러인데, 상단의 하늘과 구름은 남양주시 별내동에서 촬영한 불암산 풍경 사진의 일부다. 맑은 가을날 망향비빔국수 앞 육교 위에서 바라보는 불암산 풍경은 정말 근사하다. 아이폰8로 찍어도 이 정도 사진이 나온다. 정상 위의 세 덩이 구름은 체험, 표현, 이해의 세 영역이 어우러진 삼위일체의 글쓰기를 상징할 리가 없다.
1년마다 갱신하던 readme.kr 도메인/호스팅 비용을 처음으로 ‘장기 연장’ 결제했다. 회사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정규직 전환을 올해는 해줘야 하지 않나! 정도 느낌이랄까?… 로그를 보면 방문자수는 15년째 항상 하루 천 명 정도다. 더 늘지 않는 게 야속하다가도 일정하게 유지되는 조회수를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매일 내 안부가 궁금하여 찾아주는 분이 천 명이나 된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가져보기도 한다.
유튜브는 2021년에 첫 콘텐츠를 올렸고 2023년이 되면서 200개가 넘었다. 채널 이름인 ‘올읽쓰’는 ‘올바로 읽고 쓰기’의 줄임말이기도 하고, ‘all expressions’의 앞부분 발음이기도 하다. 채널 주소는 @allexpressions이다.
영상을 제작할 때 어떻게 하면 많은 이들이 볼까 하는 것에는 나는 별로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공동체에 더 이로운 콘텐츠를 만들까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윤리적인 인간이 되었는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여튼 공동체 윤리까지는 아니어도 칭찬받을 일을 하는 게 좋아서, 설사 아무도 안 볼지라도 누군가 해야 할 의미 있는 일이라면 그걸 기꺼이 한다. “시일야방성대곡” 기존 번역 오류를 발견하여 올바른 뜻으로 다시 번역하는 일도 그 중 하나다.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대중적 인기와 거리가 먼 길에만 단련이 되었을까… 그런 생각도 가끔 하지만,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좋은 점도 많다. 혹시 내가 대중적 인기를 끈다면? 혹시 내가 돈 잘 버는 작가가 된다면? 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자. 그런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내가 변할 건 없다. 그런 것들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 사랑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 선구적인 학자들이 열어가는 새로운 지식 영역 등은 나를 변화시킨다. 밀레니엄 난제 중 하나인 푸앵카레의 추측을 증명한 수학자 그리고리 페렐만은 클레이수학연구소의 상금 백만 달러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우주의 비밀을 좇고 있는데, 어찌 백만 달러를 쫓아가겠는가?” 그는 필즈상 수상도 사양했다. 앎과 진리를 향한 그 순수한 열정을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