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계획을 세우며 시작되어 지식을 채우며 끝난다. (2) 파리와 베르사유

2023년 10월: 파리-베르사유-제네바-알프스-베네치아-피사-로마 기행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을 보며 그곳에 앉아있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제임스 조이스를 상상해보았다. 서점 주인 실비아 비치는 작가들의 후원자였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제임스 조이스의 난해한 작품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헤밍웨이가 쓴 회고록인데 무척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파리 시절에 관한 이야기다. 허기를 견디느라 음식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뤽상부르 공원에서 종일 글을 썼다는 구절이 나온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에서 10분만 걸어가면 뤽상부르 공원이 나오지만 그다음 일정상 가보지는 못했다. 그다음 일정이란 ‘팡테옹’(볼테르, 루소, 위고, 졸라, 퀴리부부 등 프랑스 출신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역사적 역사적 인물들을 추모하는 공간) 방문이었는데 폐장 시간에 가는 바람에 여기도 들어가질 못했다. 하나를 포기한다고 하나를 꼭 얻는 건 아니다.

영화 <비포 선셋>에서 제시와 셀린이 재회한다.


로마와 파리 시내를 유람하면서 내가 ‘바로크적’인 건축과 예술 양식에 깊이 매혹된다는 점을 확인했다. 내가 이렇게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니! 1800년대 중반에 파리시장 오스망은 야심찬 도시 계획을 과감하게 추진하여 샹젤리제 거리(위 첫째 사진, 둘째 사진은 에펠탑에서 본 파리시내)를 포함하여 파리를 완전히 새로운 모습의 도시로 만들었다. 영어 사전에는 도시 재개발을 의미하는 ‘오스망니제이션’(Haussmannization, 오스망식으로 바꿈)이라는 단어가 등재돼 있다.

루브르(위 왼쪽 사진)는 바로크 양식에 따라 지어진 것이며 오페라 가르니에(위 중간 사진)도 그렇다. 로마의 관광명소 트레비 분수(위 오른쪽 사진)도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나는 모두 홀리듯 마음을 빼앗겼다. 반면에 파리에는 노트르담이나 샤르트르 대성당처럼 하늘을 찌를듯 지어진 고딕 양식 건축물도 물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멋진 생트-샤펠 성당 내부(아래 왼쪽)을 보면서 저렇게 많은 유리창을 내면서 석재로 저렇게 높이 건물을 올리는 게 어떻게 가능할지 사뭇 의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내부를 무수한 높은 유리벽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려면 상부의 석재 하중을 분산할 만한 지지대가 필요한데 고딕 성당은 그 날개벽(위 오른쪽)을 성당 외부로 빼놓았다. 지지대가 노출돼 있는 것이라 미학적 아름다움을 그만큼 포기한다는 뜻이다. 노트르담 성당 외벽을 보면 내부 하중을 견디게 하기 위해 생선 뼈다귀처럼 수없이 덧댄 외부의 날개벽들이 나와 있다. 내부 천장을 극한으로 높여서 웅장하고 신비한 효과를 내면서, 그 대가로 외부에 버팀벽을 덧대는 것은 고딕 건축물의 특징이다. 취향에 따라서는 그것마저 멋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기괴한 고딕 건축물에 아무런 감흥이 없다. ‘로마네스크’니 ‘르네상스’니 ‘바로크’니 ‘고딕’이니 하는 양식 용어들은 모두 근대 이후 학자들이 붙인 명칭이니, 우리가 고대와 중세의 작품들을 감상할 때 편의상 잘 사용하면 되지 형식에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센 강의 다리들은 대체로 소박하다. 그래서 화려한 알렉상드르 3세 다리는 유독 두드러져 보인다.

균형미와 우아함을 간직하면서도 또한 매우 화려한 바로크의 매력은 넓고도 깊고 오묘하다. 그렇지만 때로는 장식이 지나치기도 한데 베르사유 궁의 거울방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치장을 해서 그런지 주렁주렁 걸린 샹젤리에가 아름답거나 우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미적인 특징보다는 1차대전 종전을 선언한 ‘베르사유 조약’ 같은 역사적 의미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관람을 했다.


베르사유 궁 / 거울방 / 루이 14세 초상

베르사유 궁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책과 인터넷으로만 보던 루이 14세 초상이 눈앞에 보이니 약간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베르사유 궁 입구에 있는 루이 14세 기마상 / 루브르 박물관 광장에 있는 루이 14세 기마상

위 사진들은 파리 샤를 드골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에투알 개선문의 모습으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멀리서 보면 단아하고 웅장한데 가까이 보면 바로크 건축물만큼이나 화려하다. 나폴레옹의 명으로 1806년에 짓기 시작해 1836년에 완공되었다.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 거리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간다. 이 모양이 빛나는 별(에투알)과 별빛을 연상시킨다 하여 ‘에투알 개선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여기서 남동쪽 샹젤리제 거리 끝이 콩코드 광장이고 여기에 금박으로 장식된 오벨리스크(아래 왼쪽)가 서 있다. 에투알 개선문의 반대 방향 북서쪽으로 쭉 가면 라데팡스(현대적으로 조성된 파리의 부심)의 신개선문과 만난다.

콩코드 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유물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약탈한 것이라 여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집트에서 프랑스에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역시나 섣불리 판단해버리면 안 된다.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위 오른쪽)는 로마 황제 칼리굴라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으로 원래 자신의 명으로 건설한 전차 경기장에 세워두었던 것이다. 이 전차 경기장을 허물고 여기에 나중에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당한 곳이 거기였으므로 그 자리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나중에 광장 한가운데로 옮겼고 그리스도의 승리를 표현하기 위해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십자가를 올렸다.

로마, 베네치아, 파리에서 인간이 만든 걸작들을 마음껏 감상했다. 자연의 대리석을 가지고서 인간의 솜씨로 빚은 걸작 조각들에 눈길을 빼앗겼다.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브라치… 망치와 끌로 돌덩이를 자유자재로 주무르며 신적인 형상을 드러낸 예술가들이다. 미켈란젤로는 작업에 알맞은 돌을 고르는 데 시간을 많이 썼으며 일단 작업이 시작되면 한쪽면에만 스케치를 하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자신의 일은 돌 안에 깃든 형상을 풀어헤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서 전혀 어려울 것이 없었다고 한다. 아, 천재들의 생각이란.


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밀라노 귀족 부인 초상”(루브르) / 중: 다니엘레 볼테라, “미켈란젤로”(루브르) / 우: 라파엘로, “성모자”(루브르)

미켈란젤로에게는 조각이나 건축뿐 아니라 그림 의뢰도 많았다. 그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며 척추가 휠 정도로 고생을 했으나 초인적인 능력으로 극복하였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는 인간적인 것인가, 신적인 것인가. 아마도 둘 다인 것 같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업, 다 빈치와 라파엘로의 회화 작업… 초월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에게는 분명히 어떤 신적인 것이 깃든다.

고치고 다듬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파리는 거대한 박물관이면서 거대한 공사 현장이다. 계속 뭔가를 복원하고 뭔가를 새로 짓는다. 파리 시내 곳곳에 공사 현장이 많은데 내부가 보이지 않게 하고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도록 가림막을 깔끔하게 설치해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거울처럼 맞은편 풍경이 비치도록 가림막을 만든 곳도 있다. 아래 왼쪽 사진은 루브르가 비치도록 거울처럼 가림막을 만든 루브르 맞은편 공사 현장이고 중간 사진은 광고를 겸한 오페라 가르니에 보수 현장이다. 화재로 소실된 노트르담 성당의 복원 현장은 너무 높고 방대해서 그런지 따로 가림막이 없다. 전 세계적인 관심사를 받았기 때문에 복원 과정 자체가 관광 상품이 되는 것 같다. 훼손된 노트르담 앞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파리는 일본의 교토와 일견 비슷한 면이 있다. 천년이 된 것과 백년도 안 된 것들이 공존하지만 서로 잘 어울리게끔 우아하고 예쁘게 잘 보존한다.



가림막 뒤에서 2층과 3층을 공사 중인 건물. 광고도 커다랗게 걸려 있지만 깔끔하다. 오페라 가르니에 2층에서 촬영.

파리 지하철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도 많이 듣고 아예 기대치를 확 낮추고 가서 그런지 막상 이용해보니 나쁜 점도 없었고 불편한 점도 없었다. 사소하지만 특이한 것 중 하나는 안내 방송이 매우 심플하다는 점. “이번 정차할 역은 사당, 사당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가 아니라 “샤틀레? 샤틀레.” 끝. 악명 높은 ‘지린내’도 별로 맡아보지 못했는데, 최근에 많이 늘어난 공중화장실 덕분일 것이다. 파리 여행에서 정작 힘든 것은 온거리에 가득한 담배 냄새였다. 어린이가 옆에 있어도 대놓고 담배를 피운다. 누구나 길거리에 걸어다니며 담배를 피우는 파리는 진정 흡연자의 천국이다. 그렇지만 거리는 매우 깨끗해서 그 많은 담배꽁초는 다 어떻게 처리하는 건지 신기하기만 했다.

에펠탑은 예상을 완전히 뒤엎은 충격적인 건축물이었다. 엘리베이터도 타고 계단도 오르내리며 본 에펠탑은 TV나 인터넷으로만 볼 때와 전혀 달랐고 이 엄청난 하중을 안전하게 견디는 설계가 너무나 놀라웠다. 사람들 말마따나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말이다. 계단을 올라가며 느껴지는 진동에 다리가 덜덜 떨렸다.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며 유치한 세계박람회의 상징 구조물로 만들어진 에펠탑은 설계자 구스타프 에펠의 이름을 땄다. 전망대에서 에펠탑 모양으로 디자인된 예쁜 가위를 몇 개 샀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보고 갖고 싶었는데 마침 기념품점에 있었다. 중세풍의 일관된 도시 디자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이 거대한 철골 구조물은 당대의 혹평들을 모두 이겨내고 파리와 프랑스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퀴즈: 파리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는 어디일까? 정답: 디즈니랜드 파리



마지막 사진은 에펠탑 전망대에서 본 북쪽 전경으로 활처럼 휘어진 날개가 붙은 건물은 세계박람회장으로 사용되었던 사이요궁이다.

파리 숙소를 루브르 박물관 앞으로 잡은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퐁피두… 주요 미술관들이 걸어서 이동해도 될 정도로 가까이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튈르리 정원을 통과하면 끝에 오랑주리 미술관이 있다. 그 앞은 콩코드 광장이다. ‘오랑주리’는 ‘오렌지 보관창고’를 일컫는다. 원래 오렌지 나무를 키우던 온실이었다가 모네가 작품을 기증하면서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오랑주리의 대표작은 당연히 모네의 “수련”이다. 타원형인 건물 벽에 둥그렇게 둘러서 전시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모네가 작품을 기증하면서 부탁한 조건이 ‘햇빛이 잘 드는 흰벽에 전시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볕이 잘 드는 온실이었기 때문에 요구 사항에도 잘 맞았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모네의 작품만 너무 강조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앙리 루소 같은 거장들의 작품들이 사람들 관심도 거의 못 받고 천대받는 듯하여 의아하고 신기했다. 앙리 루소는 일러스트를 좋아했던 내가 중고등학생 때 처음 좋아했던 화가인데 그림에 반해서 난생 처음 도록을 구매했다. 일러스트 느낌이 나서 좋아했던 것 같고 여전히 좋아한다. 시슬리 피사로 모네를 나란히 배치한 벽면이 무척 멋졌다.

앙리 루소가 오랑주리에서 이런 서운한 대접을 받는 건 바티칸 박물관 한켠의 앙리 마티스에 비하면 약과인 것 같다. 그리스로마 시대, 르네상스 시대 걸작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인파에 떠밀리느라 체력마저 바닥난 이들은 의자가 마련된 공간에서 그저 앉아 쉴 뿐 벽에 전시된 마티스 그림들에 진지하게 눈길을 줄 만한 여유가 없는 듯 보였다. 아내가 권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바티칸에서 앙리 마티스, 피카소 같은 현대 작가의 그림들은 인테리어 소품이 된다.

현대 미술관에 해당하는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 센터(대통령 ‘조르주 퐁피두’ 이름을 땀)에서는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크 샤걀, 페르낭 레제, 만 레이, 앤디 워홀(아래 둘째), 잭슨 플록(아래 셋째)… 현대 거장들의 다채로운 작품들 덕분에 관람이 즐거웠다. 한국 작가 최욱경의 작품(아래 넷째)도 있다.

퐁피두 센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를 때 오른쪽으로 보이던 파리의 일몰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앞쪽 멀리 에펠탑이 보이고 뒤편 멀리 몽마르트가 보인다. 귓전에는 “파리의 하늘 아래”라는 샹송이 자동 재생된다.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가 설계한 오페라 극장 ‘오페라 가르니에’는 화려함의 극치라고 할 정도로 매우 멋지고 근사했다. 중간 사진의 극장 내부 천장 그림은 샤걀 작품이다. 계단을 하나 올라가면 복도에 오페라 작곡가, 가수, 댄서의 조각상들이 진열돼 있다. 댄서 ‘귀마르’의 조각상 위에 그리스어로 ‘갈리아’라고 새겨져 있다. 갈리아는 옛 알프스 북부 지역이자 거기에 살았던 골족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정에 나선 그 땅이다. 유럽 역사에 나오는 민족 구분은 언제나 복잡하고 어렵다. 도무지 헷갈릴 때는 ‘게르만족의 분파겠지’ 하고 찍으면 얼추 맞는다. 게르만이라는 용어는 로마 사람들 입장에서 북쪽의 ‘이민족’을 통칭하여 가리키던 명칭이다.

루브르에서 많은 작품들 앞을 지나갔는데 이른바 ‘교과서 그림’ 중에서 처음 만난 것은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인 조토의 “성흔을 받는 프란치스코”였다. (아래 첫째 사진) 중세의 황혼녘 또는 르네상스의 여명기에 그려진 것이다. 특히 넋 놓고 본 작품들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들이다. “마라의 죽음”을 보지 못해 아쉽지만, 미술 교과서는 물론이고 여러 인문학 책에 종종 나오는 여러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 황홀했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아래 셋째 사진)도 그렇고 작품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대체로 거대했다. 아래 거대한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이 둘 있는데 왼쪽은 루브르에 있고 오른쪽은 베르사유 궁에 있다. 채색이 살짝 다른 부분이 있다. (힌트는 분홍 드레스)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을 유심히 보면 건너편에 인물들이 집중돼 있는 반면 관객쪽에는 등지고 있는 인물들이 하나도 없이 활짝 열려 있다. 이것은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가 이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대관식이 열리는 공간 안에 함께 참석하고 듯한 효과를 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관람객들과 함께 찍힌 사진을 보면 그런 효과가 실제 나타나는 듯하다.

실화 사건을 모티프로 그려진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도 볼 수 있었다. 사진 속 관람객들과 비교하면 크기를 짐작할 수 있듯, 거대한 작품이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도 압도감을 선사한다.

거대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큰, 루브르에서 가장 커다란 그림은 베로네세가 그린 “가나의 혼인 잔치”인데 빛이 반사되어 사진이 잘 안 나왔는데, 그림이 너무 커서 빛 반사 안 되는 촬영 지점을 찾기 어려웠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무너질 때 나폴레옹이 약탈해온 것이다. 그림이 너무 커서 몇 조각으로 잘라서 가져온 다음 복원했다. 화가들이 어떤 캐릭터들의 모습을 상상으로 채워넣어야 할 때 자기 모습이나 동시대 인물들의 모습을 그려넣기도 하는데, 베로네세는 이 그림에서 자신을 포함해 당대의 예술가들인 티치아오, 틴토레토 등의 모습을 악사들로 분장하여 등장시킨다. 아래 중간 왼쪽 부분의 흰색 옷을 입은 악사가 베로네세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1848년까지의 작품까지만 전시돼 있고 그 이후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을 비롯한 다른 곳에 전시된다. 왜 1848년을 기준으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혁명의 해였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참고로 오르세는 1914년까지 발표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르네상스 화가들도 그렇고 자크 루이 다비드를 비롯한 근대의 (신)고전주의 작품들은 확대해보면 세밀함과 정교함이 돋보이지만, 파격을 일으켰던 인상주의 작품들은 확대하면 형태가 없는 거친 물감 덧칠만 보일 뿐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많이 본 인상주의 작품들은 그런 점에서 놀라웠다. 아래는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과 “루앙 대성당”인데, 가까이에서 본 모습과 멀찍이서 본 모습을 비교해보았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고흐, 세잔, 르누아르, 모네, 마네 등 수많은 인상주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아래 왼쪽 첫 작품은 모네가 그린 “런던 의사당”인데 인상주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그다음 작품들은 고흐, 둘째 단은 르누아르, 쇠라, 툴루즈-로트렉이다. 툴루즈-로트렉의 처연한 인물 묘사가 좋다.

작품들을 즐겁게 감상하던 도중에 밀레의 작품들을 보았는데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고흐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밀레를 모방하며 그림 연습을 했다. 아래 왼쪽이 “만종”이고 오른쪽은 “이삭 줍기”를 부분 확대한 것이다. “이삭 줍기”도 커다란 작품은 아니지만 “만종”의 크기가 생각보다 매우 작았다. 크기가 작다고 해서 소품인 것은 아니다.

다른 작가들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부그로나 카바넬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도 즐거웠다. ‘비너스의 탄생’ 하면 보통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을 떠올리지만 이 주제로 수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다.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부그로와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도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아름다운 걸작이다. 같은 테마를 갖고서 예술가의 생각과 기법에 따라 달리 그린 작품들을 비교하는 것도 미술 감상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1863년 살롱전(유럽 최고 권위 미술 공모전) 당선작이었는데 당시 낙선작 중에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있다. 당시 당선 기준에 대한 정당성 논란 때문에 황제가 낙선작들을 따로 모아 전시회를 열어주었다고 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전시된 방_오르세 미술관

파리 예술 기행이 남긴 중요한 성과는 다음에 다시 와야할 이유가 생겼다는 점. 이번에 시간에 쫓겨 보지 못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도 봐야 하고, 쿠르베의 “오르낭의 장례식”도 봐야 하며, 로댕의 “지옥문”과 “칼레의 시민”도 봐야 한다. 그 외에도 보고 싶은 작품 목록은 즐겁게 늘어나는 중이다.

**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