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계획을 세우며 시작되어 지식을 채우며 끝난다. (1) 로마와 바티칸

2023년 10월: 파리-베르사유-제네바-알프스-베네치아-피사-로마 기행

여행 중에는 낯설거나 새로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견문이 넓혀진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알게 된다. 그렇지만 선행 학습이 지나치면 본수업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는 것처럼, 지나친 여행 예습은 여행을 만끽하는 데 오히려 역효과를 줄 수도 있다. 예습은 적당히, 복습은 충분히!

간직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면, 카메라에 영상으로 담기에 앞서 맨눈으로 느끼고자 했고, 마음의 눈으로 그 생생함을 체험하고자 노력했다. 영상으로 담을 수 없는 감촉이나 냄새, 특유한 어떤 분위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옅은 바다 내음이 뭍은 산들바람이 불던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 노천 카페에서 와인 한 잔에 연주자들의 공연을 들으며 깊어가는 밤을 음미했던 느긋하고 충만했던 순간들… 그런 경험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충분히 담을 수는 없다.


* 수록된 사진은 모두 직접 촬영하거나 구매한 것이다.

느낀 것을 문자 표현으로 저장하는 것은 내 직업이자 취미이기도 해서 주머니에는 늘 메모 도구가 있다. 그런데 막상 기록을 하면서 내가 평소에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해 감탄할 때 표현의 스펙트럼이 별로 다양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리의 생트-샤펠 성당(아래 사진)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면 알 수 있듯 빨강에도 진한 선홍색부터 옅은 분홍색까지 얼마나 다채로운 빨강들이 존재하는가. ‘달다’와 ‘쓰다’ 중간에 달콤쌉싸름함을 비롯하여 수없이 다채로운 맛의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듯…

이번 여행에서 감탄할 일이 무척 많았는데 돌아보면 그 각각의 느낌과 정도가 모두 달랐음에도 표현은 대체로 비슷했던 것 같다. ‘대박’이나 ‘미쳤다’ 같은 단조롭고 경박한 유행어를 쓴 건 아니지만 ‘와’ ‘엄청나네’ ‘좋네’처럼 식상한 표현들을 주로 썼으니 결과적으로는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고보면 학자들이 예술 양식들을 다양하고 복잡하게 세분화하여 분류하는 것도 아름다움의 스펙트럼을 정교하게 표현하고 간직하여 충분히 전달하기 위한 시도와 노력일 것이다. 적절한 표현들은 여행의 풍미를 한층 돋워둔다. 생트-샤펠의 화려함, 베르사유 궁의 화려함,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의 화려함… 이렇게 다양한 화려함의 스펙트럼을 개성 있게 잘 드러내려면 ‘화려’ 말고 뭔가 다른 세부 표현들이 필요할 것이다.


좌: 바티칸의 북동쪽 끝 / 우: 성 베드로 성당 입구

제각기 아름다움의 모습이 달랐으나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곳은 바티칸이다. 북쪽의 바티칸 박물관 입구로 들어와서 시스티나 경당까지 남쪽으로 관람을 한 다음 나오면 서쪽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고 동쪽으로는 광장이 펼쳐진다.


성 베드로 성당의 정면(파사드)은 카를로 마데르노가 만들었다.

대성당 파사드 상단에 새겨진 문구는 “위대한 로마 교황 바오로 5세 보르게세를 기리며, 재위 7년인 1612년에”라는 뜻이다. 정동향으로 지어졌다. 사진 앞쪽으로 사도 바울의 동상이 보인다. 실제로는 성당을 정면으로 보고 오른편에 있으며, 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대칭이 되는 왼편에 베드로의 동상이 있다.

아래 사진 왼쪽은 바티칸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보이는 로마와 바티칸의 국경선이다. 흰색 선 왼쪽이 바티칸 성벽이고 선 오른쪽이 로마다. 바티칸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바티칸 박물관인데 문구(MVSEI VATICANI) 위에 미켈란젤로(좌)와 라파엘로(우)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 바티칸 곳곳에 두 예술가의 자취가 스며들어 있다. 나는 가톨릭 신자도 아니지만 바티칸의 성스러운 기운에 오랫동안 온 심신이 휘감겨 있었음을 고백해야겠다. 입구로 들어가서 야외로 나가면 솔방울 정원(둘째단 왼쪽 사진)이다. 소나무는 로마의 상징이다. 솔방울 조각상은 판테온 옆에서 발굴된 것을 1600년대에 이곳으로 가져왔다. 솔방울 뒤쪽의 움푹 들어간 공간은 판테온 내부를 본뜬 것이다.


“무사 여신들(뮤즈)의 방”으로 들어간다. 음악이나 시 창작에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로 여겨지는 ‘뮤즈’(Muse)의 어원은, 그리스어 ‘무사’(Μουσα, 복수형은 무사이(Μουσαι))인데, 예술이나 학술 등을 관장하는 신들을 가리킨다. 최고신인 제우스와 기억의 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모든 지적인 창작물은 ‘기억’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영어 단어 ‘뮤지엄’의 어원은 그리스어 ‘무세이온’(Μουσεῖον)인데 ‘무사 여신들의 자리(거처)’라는 뜻이다.


역사를 관장하는 ‘클레이오’ / 천문을 관장하는 ‘우라니아’ / 찬가를 관장하는 ‘폴륌니아’ / 희극을 관장하는 ‘탈레이아’

무사 여신들 방을 지나면 “벨베데레의 토르소”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모델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 ‘아이아스’다.

발견 당시 교황이 미켈란젤로에게 온전한 신체로 복원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미켈란젤로는 이미 완벽한 작품이라서 손을 댈 수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토르소를 보고 그린 루벤스의 스케치가 있다. 로댕의 걸작 ‘생각하는 사람’은 이 토르소와 산 로렌초 성당 조각에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벨베데레’는 ‘전망 좋은’이라는 뜻이 담긴 궁전 이름이다. 여기서 성 베드로 대성당이 한눈에 보인다. 복도를 따라 걷다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아이콘인 페리클레스 두상을 보았다. 교과서나 참고서에서 보던 이미지의 실물 조각상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을 추모하며 했던 연설이 유명하다.

<심마니 세계사>에서 발췌

고대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두상도 보였다. 실존 인물 중에서 그리스로마 시대를 통틀어 조각상의 모델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가 하드리아누스 황제라고 한다. 20세기 작가인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지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때문인지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아래 오른쪽 사진은 테베레 강가에 있는 산탄젤로성(성천사 성)인데 원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가문의 묘로 조성한 건축물이다. 추후 요새로 개조되었다. 교황청이 공격을 받았을 때 교황이 이곳에서 반년 이상 칩거한 적이 있다.

다리 위에는 1600년대에 만든 베르니니의 천사 조각상들이 있다. 현재 다리 위에 있는 것들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에 보관돼 있다. 성으로 연결된 “성 천사의 다리”는 건너서 왼쪽으로 가면 성 베드로 광장으로 통하기 때문에 과거에는 “성 베드로 다리”라고 불렸다. 단테의 <신곡>에도 등장한다.

마치 희년에 수많은 군중 때문에
로마 시민들이 다리 위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도록 배려하여

한쪽으로는 모두 성쪽을 바라보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가고, 다른
한쪽으로는 언덕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이쪽저쪽의 검은 바위 위에서는
뿔 난 악마들이 채찍으로 그들의
등을 잔인하게 후려치고 있었다.

- “지옥편” 제18곡 28행~ (김운찬 옮김, «신곡», 열린책들, 2022)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1300년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특별한 해(禧年, 희년)로 선포했다. 1300년에는 수많은 순례객이 성 베드로 성당에 가기 위해 이 다리로 몰려들었다. 2023년에도 바티칸을 찾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책과 여러 온오프라인 자료들에 자주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두상도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데 인파에 치여 찾아보지 못했다. 역사 책을 읽으며 보았던 인상적인 두상을 하나 더 꼽자면 부리부리한 눈을 지닌 거대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조각상인데 현재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있으며, 원래 있던 자리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아래 사진)다. 바실리카는 로마 시민들이 이용하던 공공 시설물로서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교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규모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여행지에서 꼭 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반드시 미리 계획을 세우고 자연스러운 이동 동선을 그려보아야 한다. 가령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보려면 로마 바르베리니 궁전(국립 고전 미술관) 관람 정보를 미리 파악해두어야 할 것이다. 숙소와 가까이 있었는데도 시간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아서 관람은 못했다.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공동 설계한 바르베리니 궁전,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공주(오드리 햅번)가 묵었던 곳.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려면 은하수가 잘 보이는 장소로 무작정 가서는 안 되고, 보름달이 뜨지 않는 날을 미리 알아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물론 당일 날씨도 맑아야 한다. 날씨야 우리 의지대로 바꿀 수 없지만 달빛이 비치지 않는 날은 우리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다. 낯선 여행지에서는 우리 의지로 통제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 책과 원고 안에서만 만나던 신성로마제국(그리스도교의 영향권이 미친 제국)의 황제 대관식이 여기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렸다. 카롤루스 황제(샤를마뉴)가 800년 12월 25일 여기에서 교황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수여받는다. 이 사건은 앞으로 세계사에 펼쳐질 신성로마제국 역사의 기원이 된다. 신성로마제국은 962년 오토 황제의 대관식과 더불어 공식 출범했다. 성 베드로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으로 324년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지어졌는데, 총감독 브라만테의 기획으로 1506년부터 새로 짓기 시작했다. 세월이 120년이나 흐른 1626년에 대성당은 완성되었고 광장은 1667년에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작업에 참여했다. 이곳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성지이지만, <하룻밤에 읽는 서양사>의 저자로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절을 썼던 내가 이곳에 간 것은 비유적 의미의 ‘성지 순례’였던 셈이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된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 장면을 주제로 그린 라파엘로의 작품이 라파엘로의 방에 있다. 라파엘로를 교황에게 소개하고 추천한 인물이 누구냐면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 책임자인 브라만테다. 브라만테 사망 후 라파엘로가 건축 책임자가 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과정에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면벌부를 팔았던 시기가 있다. 이토록 화려하고 장엄한 작품의 이면에는 어둡고 수치스러운 역사 또한 스며들어 있다.


상단: 성 베드로 대성당과 광장
하단: 베르니니가 만든 발다키노(제대) / 지도의 방 천장 / 라오콘 군상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 “라오콘 군상”을 비롯하여, 평소에 원고를 쓰면서 언급했던 장소들과 작품들을 찾아보는 일은 희열과 기쁨을 주었다. 미리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하게 친숙한 대상과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파리에서 버스를 타고 센강 중간에 떠 있는 시테섬으로 갔다가 오르세 미술관 쪽으로 향하는데 차창 밖으로 콩도르세 동상이 보였다. 콩도르세는 수학자이자 정치가였던 계몽 사상가다. 선거처럼 정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확률과 통계로 분석한 인물로도 유명한데, 치열하게 경쟁하는 두 후보를 물리치고 어부지리로 당선되는 선거 승자를 ‘콩도르세 승자’라고도 부른다. 저명한 수학자였던 콩도르세는 훨씬 더 유명한 수학자 오일러가 죽었을 때 이런 추도사를 남겼다. “계산을 멈추자 그의 삶도 멈추었습니다.”

이탈리아 로마 테르미니역에 도착했을 때 역 앞에 서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동상(아래 첫째 사진)을 본 것도 반가웠다. 초등학생 때 TV에서 교황님의 방한 소식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관심도 없고 몰랐지만 교황의 방한은 천주교 전래 200주년에 맞춘 것이었다. 대한뉴스를 찾아보니 “벗이 있이 멀리서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 하는 논어 구절을 인용하며 한국에서의 첫인사를 남기셨다. 성 베드로 성당 외부 벽면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성상(아래 둘째 사진)도 조각돼 있다. 2023년 9월 17일, 순교 177주년이 되는 날에 세워졌는데 방문일이 10월 17일이니 딱 한 달 지났다.

바티칸 박물관 “서명의 방”에 있는 라파엘로의 벽화 “아테네 학당”은 아마도 인문학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가장 많이 보았고 또 가장 자주 언급한 작품일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그 작품을 받아들이던 그 벅찬 느낌을 오래 마음속에 간직하려고 인파 속에서도 벽화 앞을 거닐며 보고 또 보았다. 그림 중앙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이데아)을 가리키는 인물이 플라톤인데 동시대 예술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얼굴을 모델로 그렸다. 라파엘로는 존경하는 또 다른 동시대 예술가인 미켈란젤로의 모습을 모델로 헤라클레이토스를 표현했다. 플라톤 앞쪽으로 팔을 괸 채로 계단에 걸터 앉은 인물이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에는 이 걸작의 초안 스케치가 있다.

“아테네 학당”은 이 방의 4면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데, 4면에는 당시에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네 가지 학술 분야인 “신학”, “철학”, “법학”, “시학”(예술)을 상징하는 그림들이 하나씩 그려져 있다. “아테네 학당”은 그 중에서 ‘철학’에 해당하는 벽화다.


“아테네 학당”(동쪽, 철학) – “성체 논의”(서쪽, 신학) – “신학적 덕목과 법”(남쪽, 법학) – “파르나소스”(북쪽, 시학/예술)

첫째날 바티칸 관람을 마치고 로마에서 둘째날에는 콜로세움을 관람했다. 그다음 포로 로마노(고대 로마 중심지)를 천천히 거닐었고, 대전차 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영화 <벤허>의 모티프, ‘서커스’ ‘서킷’의 어원)까지 걸어갔다.


좌: 네로 거대 동상터 / 우: 콜로세움 고고학 박물관 공사 현장

콜로세움을 관람하기 위해 사람들이 약속 장소로 잡는 곳은 전철역 건너편의 네로 동상이 있던 자리다. 여기 가장자리에 걸터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앙부(위 왼쪽 사진)에 이런 문구가 보인다. “AREA DEL BASAMENTO DEL COLOSSO DI NERONE”(아레아 델 바사멘토 델 콜로쏘 디 네로네). 이 문구는 라틴어가 아니라 후대(현대)에 새긴 이탈리아어로 ‘네로의 거대 조각상이 있던 자리’라는 뜻이다. 원형 경기장을 지으면서 네로 조각상을 허물었다. COLOSSO는 거대 조각상을 일컫는 말이다. 콜로세움(이탈리아어: 콜로세오)이라는 별명도 ‘거대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가문의) 원형 경기장’이다. (AMPHITHEATHRUM FLAVIUM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 그렇지만 누구나 ‘콜로세움’(이탈리아어: 콜로세오)이라고 부른다. 원형 경기장의 ‘거대함’을 감안하면 적절한 명칭이다.


견고하고 아름다운 아치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비롯한 영상물의 영향으로 콜로세움 하면 검투사 결투 장면이 먼저 떠오르는데, 검투사 경기뿐 아니라 로마 시민들을 위한 다채로운 공연이 열린 종합 대극장이었다. 유명 가수들의 대형 공연을 보면 무대 아래에 있던 주인공이 조명을 받으며 위로 떠오르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는데 그 원조가 콜로세움의 승강기 시스템이다. 관중들에게 극적인 효과를 선사하려고 물을 가득 채워 해상 전투까지 재현했다고 한다. 이소룡 영화 <맹룡과강>에 콜로세움 격투씬이 나온다. (세트에서 촬영)

현재 콜로세움은 원래의 ‘세겹’짜리 중에 거의 다 유실되고 안쪽 것만 남아있는데, 원래의 중간 겹과 바깥쪽 겹의 일부가 조금 남아있다. (위 둘째 사진) 원형 경기장 바닥에는 모래를 깔았는데 대형 원형 경기장을 가리키는 말인 ‘아레나’의 원뜻이 모래다. 콜로세움 관람 후 가까이에 있는 포로 로마노를 둘러보았다. 포로 로마노(라틴어: 포룸 로마눔)는 고대 로마의 중심지로서 ‘포로’(포룸)는 공공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함께 모여 의견을 나누는 곳으로 ‘포럼’의 어원이다.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사이에 티투스 개선문(다음 첫째 사진)이 크게 보인다. 티투스 개선문은 황제의 아들이었고 향후 황제가 되는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을 기념해 세워진다. 파리에 지어진 에투알 개선문(중간 사진)의 모델이다.

콜로세움과 더 가까운 쪽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위 셋째 사진)이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정적 막센티우스를 제거하고 제국의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10년 뒤에 원로원에서 추진하여 개선문을 세웠다. 다음은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줄리오 로마노) 프레스코화다.

포로 로마노를 보려면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하다. 비유하자면 1000피스짜리 퍼즐의 대부분이 없어지고 50피스 정도가 띄엄띄엄 남아있는 것이니, 나머지 조각들은 상상으로 채워야 한다. 그렇지만 현장의 폐허를 보고서는 원래 모습이 어떠했을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팔라티노 언덕(로물루스, 레무스 형제가 늑대젖을 먹고 자란 곳)에 오르면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 둘째 사진이 팔라티노 언덕에서 본 포로 로마노인데 우중단의 네모난 창이 있는 건물이 고대 로마의 원로원이다. 그다음 사진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다. 둘째, 셋째 사진에서 왼쪽 위로 삐죽하게 사각으로 솟은 종탑 같은 것이 있는 건물은 세나토리오 궁전이다. 현재 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앞이 캄피돌리오 광장(둘째 단 사진은 포로 로마노 반대편에서 본 모습)이고 시청사 양쪽에 박물관이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두상도 여기에 있다. (관람은 못함)


카이사르 화장터와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 추도 연설을 하던 장소인 로스트룸을 보았다. 위 둘째단 오른쪽 사진에서 사람들 뒤로 보이는 간이 지붕 아래 그늘진 곳이 카이사르 시신을 화장한 장소다. 그 뒤로 기둥이 있는 건물은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 신전’이다. 셰익스피어의 드라마 <줄리어스 시저>에 나온 안토니우스의 대사를 인용해본다.

친구들이여, 로마인들이여, 동포여, 내 말에 / 귀를 기울여주시오. 나는 시저를 칭찬하러 온 것이 / 아니라 장사지내러 왔습니다. / … 시저는 로마로 수많은 포로들을 데려왔고 / 그 보석금으로 국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 이것이 시저의 야심이었습니까? / 가난한 사람들이 울 때 시저도 울었습니다. … 저는 브루투스의 말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 제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기 위해 이곳에 섰습니다. / 여러분들 모두 한때는 합당한 이유에서 시저를 / 사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슨 이유에서 / 그에 대한 애도를 주저하고 있습니까? / 아, 이성이여!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박우수 옮김, «줄리어스 시저», 민음사, 2019, 74행~

로마로 오기 전에 미리 예습을 좀 하려고 <로마시티>(이상록 글/그림)라는 책을 사두었는데 결국 여행 전까지 그리도 손이 안 가더니만, 여행 마치고 집에 돌아와 다시 펼쳐 보니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었다. 포로 로마노를 둘러본 다음의 공허한 마음이 귀국 후까지도 조금 남아 있었는데, 이 책의 한 구절이 그런 마음을 말끔하게 씻어 주었다. “고대 로마인들이 진정으로 남긴 것은 폐허 여기저기에 나뒹구는 돌무더기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법, 제도, 예술, 도덕, 관습, 기술, 문화, 가치 같은 문명 말이다.” – 81

포로 로마노에서 콜로세움으로 향하다가 키르쿠스 막시무스 방면 큰길로 걸어나오다 보면 수도교가 보인다.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 언덕에 물을 공급하던 상수도다. 로마 실용 건축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하다. 콘크리트 아치의 아름다움이 또 다시 눈길을 사로잡는다.

산에서 수원지를 발견했을 때 이 흐르는 물을 멀리 떨어진 도시까지 옮기는 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아주 미세한 고도차로도 물은 흐르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수킬로 미터 떨어진 산에서 도시까지 수도교를 건설하면서 10미터마다 2밀리미터 정도 낮아지도록 설계를 했다. 로마 토목 기술의 경이로운 성과다. 수도교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800km나 된다.


좌: 인슐라(고대 로마의 공동주택) / 우: 콰트로 폰타네 분수 조각

로마 유적에는 종종 ‘SPQR’이라는 표기가 보이는데 이는 ‘SENATUS POPULUSQUE ROMANUS’를 줄인 것으로 ‘로마 원로원과 인민’이라는 뜻이다. 즉, 로마의 주권이 황제가 아닌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있음을 드러내는 공화정의 표식이다.

드디어 그 유명한 판테온도 관람했다. 파리에서 ‘팡테옹’을 관람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원조를 관람했으니 위로가 되었다. 다음 사진에서 왼쪽이 로마 판테온이고 오른쪽이 그것을 본뜬 프랑스 팡테옹이다. 프랑스 팡테옹은 루이 15세 때 지어진 교회였는데 외부뿐 아니라 내부도 로마 판테온을 본떴다. 엄밀히 따지면 로마 판테온 역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본뜬 것이다. 앞부분을 이렇게 지은 고전주의 건축물은 파리의 부르봉궁(프랑스 국회의사당, 아래 셋째 사진)을 포함하여 유럽에 너무나 많으며 한국(덕수궁, 경희대)에도 있다. ‘판테온’은 ‘모든 신들’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만신전’(萬神殿)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판테온 정면에는 “M. AGRIPPA. L. F. COS. TERTIVM. FECIT”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줄임말을 모두 풀면, ‘루시우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번째 집정관 임기에 만들다’라는 뜻이다.

판테온에는 라파엘로의 묘가 있다. 판테온에 묻히는 것은 라파엘로의 소망이었다고 한다. 아래 오른쪽 사진 성모상 아래에 라파엘로가 잠들어 있다.


위 중간 사진은 판테온 돔을 본떠 지은 바티칸시국의 ‘원형의 방’ 돔이다.

해설사 설명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은 <벤허>도 모르고 오드리 햅번도 모르기 때문에 키르쿠스 막시무스(위 왼쪽 사진의 천막들이 있는 터), 진실의 입(중간 사진)의 인기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하더라.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거대한 공사(발굴) 현장이라 감흥이 없었고 진실의 입은 해설사 설명과 달리 관람 줄이 너무 길어서 손 집어넣기 체험은 하지 못하고 밖에서 구경만 했다.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 출국장에 똑같이 생긴 모형(오른쪽 사진, 거짓말이 들통나 손을 물린 아들)이 있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손을 집어넣으려 하는 이 진실의 입은 원래 빗물이 빠지는 하수구, 맨홀 뚜껑이다. 빗물을 빨아들이는 강의 신을 형상화했다.


포로 로마노를 남쪽인 키르쿠스 막시무스 방면에서 본 모습. 뉘엿뉘엿 로마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시티투어버스(빅버스 로마)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옆을 지났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성 베드로 성당 광장을 설계하고 건축한 베르니니가 여기에 묻혔다는 것을 들었는데 나중에 귀국하고 나서 성 히에로니무스의 묘도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히에로니무스는 희랍어 성서를 라틴어로 옮긴 인물이다. ‘불가타 성서’라고 부른다. ‘불가타’는 귀족들이 쓰던 라틴어가 아니라 일반 민중이 사용하는 라틴어를 일컫는 것으로 성서 보급의 취지에 부합한다. 만일 번역에 종사하는 이들이 성지 순례를 해야 한다면 이곳에도 들러야 하지 않을까. 영어 번역자로서, 당시엔 몰라서 하지 못한 추후 원거리 추모를 해본다. ‘마조레’는 거대하고 위대하다는 뜻으로 영어로 옮기면 ‘메이저’에 해당한다. 베네치아의 일몰 경치 명소인 산 조르조 마조레, 베로나의 산 체노 마조레, 나폴리의 산 로렌초 마조레처럼 성당 이름에 종종 들어간다.

빡빡하게 짜인 하루 일정을 마치며 숙소가 있는 레푸블리카 광장으로 돌아온다. 이 광장은 원래 로마 최대 목욕장(목욕탕을 포함한 시민들의 휴식 공간)인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의 마당이었다. 광장에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에 데이 마르티리 성당이 있는데 목욕장 시설을 일부 보존하면서 미켈란젤로가 개조한 건물이다. 이제 숙소에 가서 목욕을 하면 로마 일정이 끝날 것이다.

테르미니역

내일 숙소 근처인 테르미니역까지 걸어가서 공항 가는 기차를 탈 것이다. ‘테르미니’는 ‘목욕장’을 일컫는 말이다. 바로 여기 레푸블리카 광장에 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을 가리킨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로마를 떠나며 읊조릴 수 있는 알맞은 문구가 떠올랐다. “나는 금방 졸업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 1787년 6월 말 로마에서 괴테(<이탈리아 기행>)

**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