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계획을 세우며 시작되어 지식을 채우며 끝난다. (4) 베네치아와 피사

교과서나 도록에는 주로 작품의 정면 모습만 나오기 때문에 그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원본 감상의 묘미 중 하나일 것이다. 루브르에서 “밀로의 비너스” 뒷모습과 옆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밀로’는 ‘밀로스 섬’을 가리킨다. 밀로스 섬에서 발견된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상이다.) 오른쪽 사진은 “승리의 여신 니케” 조각상의 옆 모습.

“에로스(큐피드)의 키스로 환생한 프시케” 조각상도 보는 방향에 따라 느낌이 모두 달랐다.


안토니오 카노바 작품(루브르 박물관)

관람 현장에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인터넷이나 다른 경로로 확인하는 것이 작품 이해에 더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예컨대 성 베드로 성당 우측 한켠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는 직접 가서 보아도 유리벽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고 게다가 거의 정면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위에서 내려다본 예수의 표정 등 다각도로 보려면 인터넷 자료가 훨씬 도움이 된다. 종종 “피에타는 위에서 보는 게 진짜!” 같은 제목의 글이 눈에 띄는데 뭐 하나만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요점은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감상법을 두루 활용하면 되는 것이지 현장에서 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모나리자 역시 울타리 멀찍이 유리관 속에 있기 때문에 수많은 인파 속에서 오래 기다려 제일 앞줄까지 갔지만 깊은 감흥을 얻기는 어려웠다. 물론 현장에서 직접 본 경험은 여러 참조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보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그래서 일부러 찾아가는 것일 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기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로 향했다. 밀라노 중앙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이 있다.

성당 뒤쪽
성당 앞쪽

성당 안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벽화 “최후의 만찬”이 있다.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들은 많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다 빈치 작품이다. 예수가 말한다, 열두 사도 중에서 하나가 자신을 배신할 거라고. 그 순간의 모습을 포착한 작품이다. 예수를 배신하게 되는 유다는 왼쪽에서 넷째 인물이다. 그림에 표현된 인물들 중에서 머리의 위치가 가장 낮다. 교과서나 인터넷 등으로 수없이 보았던 그 이미지보다 실제 보면 훨씬 더 흐리고 희미하다. 그 조용하고 어둠침침한 공간에서 미묘한 그 분위기를 느끼려고 노력했다. 다 빈치는 전통적인 프레스코화 기법을 쓰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채색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박리 현상이 일어나 그림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2차 대전 시기에 성당이 폭격을 맞는 불운도 겪었다. 수없는 복원 작업 끝에 그나마 이런 모습으로 보존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다 빈치가 그린 원본(1498)을 모사한 리졸리의 그림(1520, 영국 왕립예술원 소장)을 참조하여 복원 작업을 했다는 점이다.


반대편 뒤쪽 벽면에는 도나토 몬토르파노의 “십자가의 처형”이 그려져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가 주는 놀라움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건축과 조각에서 다른 모습으로 경험한다. 미켈란젤로의 건축과 조각 작품은 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만 나는 그의 회화 작품에는 별로 감흥이 일지 않았다. ‘천지창조’라고 보통 알려진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보다는 피에타나 베드로 성당 돔 같은 조형물에 훨씬 큰 감동을 받았다. 신이 세상을 만든 장인이라면 미켈란젤로는 신의 솜씨를 우리에게 재현하여 보여준 듯하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직간접 체험 지식을 확장할 수 있는 수많은 계기들이 생겼다는 점이 중요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았으니 다비드상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성 베드로 성당에 가지 않았다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사람들로 향하기 위해 그 모범인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본떴다고 밝힌 적이 있다. 성 베드로 성당의 아름답고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건축을 보며 르네상스 건축과 바로크 양식에 관해 공부를 하게 되었고 미학 이론 책도 읽었다. 여행 예습도 유익하겠지만 역시 나는 그보다는 심화 복습형에 적합한 듯하다.

뭔가 소중한 것을 마음속에 계속 간직하고 있으면 신기하게도(어쩌면 당연하게도) 그와 연관된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거나 어떤 연관된 계기가 만들어진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본 여운을 계속 간직하면서 그 감동과 좋은 느낌을 아내에게도 이야기했는데, 판테온을 방문했을 때 아내가 날 부르더니 라파엘로의 묘가 있다며 그곳으로 안내해주었다. 판테온의 라파엘로 묘로 나를 인도한 것은 아내이지만, 거기엔 어떤 보이지 않는 신비한 끈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여행기를 남기는 것도 그 보이지 않는 끈의 이끌림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 안토니오 비발디, 잔 자코모 카사노바의 공통점은? 모두 베네치아 출신이다. 루브르에서 보았던 거대한 그림 ‘가나의 혼인 잔치’(‘가나’는 갈릴리 지방 지명)를 그린 작가가 베로네세인데 그의 고향은 베로나(‘베로네세’가 ‘베로나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주 활동 무대는 베네치아였다.

리알토 다리

물 위에 떠 있는 도시 베네치아는 그저 신기하고 놀라웠다. 베네치아는 석호 위에 세워진 도시로서 무수히 많은 나무 말뚝을 촘촘하게 뻘에 박은 다음, 그 위에 벽돌을 쌓고 단단한 돌을 깔아서 건물을 지었다. 그래서 건물을 유심히 보면 하중을 줄이거나 버티기 위한 흔적들이 보인다. 창문(구멍)이 매우 많다. ‘아쿠아 알타’(물이 평소보다 높아질 때의 만조) 때는 건물 하단이 바닷물에 잠기기도 한다. 아래 넷째 사진은 물이 차오른 산 마르코 광장의 모습이다.

에세이 <우리가 읽고 쓰는 이유>의 첫 장에서 괴테를 다루었는데 그가 쓴 <이탈리아 기행>이 주된 모티프다. 이번 베네치아 여행 때 괴테가 잠시 머물렀던 숙소를 찾고 싶었다. 현지에서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고 베네치아 주민들 몇 명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인 여행 가이드도 괴테까지는 알았지만 머문 장소까지는 알지는 못했다. 곤돌라를 탔을 때 혹시나 하고 사공에게 영어로 독일 시인 괴테가 여기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혹시 그 장소를 아냐고 물어보았다. 사공은 바로 대답을 해주었는데 이탈리아어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들리는 대로 ‘퐁제데푸제리’라고 한글로 적어두었을 뿐 정확한 명칭은 파악하지 못했다. 수첩과 펜을 항상 갖고 다녔기 때문에 곤돌라에서 내릴 때 사공에게 글자로 적어달라고 부탁했다면 찾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나중에 지도를 보면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그곳이 ‘퐁제데푸제리’가 아니라 “폰테 데이 푸세리”(ponte dei fuseri, 푸세리 다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돌아보니 불과 50미터 근처에서 여기저기 길을 물어보며 주위만 맴돌았던 것 같다. 목적지를 지척에 두고 말이다. 우연히 발견하는 행운도 일어나는 것이 여행의 묘미라면, 애를 써도 찾지 못하는 불운도 일어나는 것이 그 행운의 반대 급부인 것이다.

눈으로 확인은 못했지만, 그 다리 옆 건물 붉은 외벽에 현판이 붙어 있고 “괴테가 여기 살았다.”(Goethe wohnte hier)라고 적혀 있다. 위키피디아 독일어판, 한국어판에는 괴테가 묵었던 베네치아 숙소 관련 정보가 안 나오지만 이탈리아어판에는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여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애를 썼다’고는 기억하지만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경로를 추적해 보는 것에 대한 열의와 관심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면,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하이라이트는 베네치아가 아니라 로마이므로 베네치아의 아쉬움은 로마 답사로 충분히 해소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3일 뒤에 가게 될 로마 일정에서 괴테가 머물렀던 곳에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원래 일정을 바꾸지 않았고, 우선 순위에 밀려서 로마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그렇게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보르게세 공원 안의 “괴테의 길”에는 1904년 독일 황제가 로마에 기증한 괴테 조각상이 있다. 트레비 분수에서 거꾸로 동전을 던졌으니 다음에 다시 로마에 가게 될 것이다. 그때를 기약한다.

곤돌라를 타고 베네치아 주택가를 지나면 이발소 표시처럼 보이는 기둥이 종종 보이는데 처음에는 이발소인 줄 알았으나 실은 당시 귀족이 살던 집이라는 표시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베네치아에서 곤돌라 사공은 안정된 고소득 직업이라서 경쟁이 치열하므로 자격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베네치아 역사에 해박해야 하고 영어도 잘 해야 하고 노래 실력까지 갖추어야 한다. 이발소처럼 보이는 표시도 곤돌라 사공이 설명을 해주었을 법한데 안 들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잘 모르는 게 있다면 단정하지 말고 확인해 보아야 한다. 이탈리아 일정에서 길찾기로 가장 곤란을 겪었던 것은 유리 공예의 성지인 베네치아 무라노섬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무라노 가는 수상 버스의 정류장이 임시로 바뀌었는데 안내가 모두 이탈리아어뿐이라 올바른 승선 위치를 파악하느라 너무 힘들었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무라노’와 ‘부라노’(다른 섬)를 달리 발음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아르세날레 조선소 입구

무라노 가는 수상 버스가 지나간 경로에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장소가 있었다. 위 사진에 보이는 산 비아시오 델레 카테네 다리를 통과하여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베네치아 공화국의 찬란한 부를 일구었던 아르세날레 조선소(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가 있다. 여행 당일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돌아와서 여행 경로를 되짚어보면서 그 옆까지 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는 안 보이지만 조금 더 들어가면 배를 만드는 거대한 독과 완성된 배가 나가는 넓은 통로가 보일 것이다. 이번에는 지도 확인으로 만족한다. 다리 오른쪽으로 보이는 창문 많은 건물은 해양역사 박물관이다.


무라노 가는 바닷길에서 만난 갑작스러운 소나기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지던 무라노

유리 공예는 르네상스 시기 베네치아의 최첨단 극비 기술로서 작품 제작 기술을 유출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불을 많이 다루다 보니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본섬에서 멀찍이 떨어진 섬에 작업장을 만들었고, 동시에 기술 유출을 막는 이점도 있었다. 추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을 때 화려한 거울방을 만들면서 이곳 무라노의 유리 장인들을 데려갔는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맞은편에서 본 유리박물관과 400년 전의 유리 작품들.

예정보다 많이 지체되어 겨우 도착한 무라노 유리박물관은 규모가 너무 작고 전시 테마도 기대보다 단순했다. 그래도 인문학 책을 읽고 원고를 쓰며 자주 등장했던 곳이라 성지 순례 차원에서는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

공방에서 작업 중인 유리 장인

유리 장인이 작업하는 모습을 직접 보아서 좋았다. 유리 공예를 왜 ‘유리 불기(Glass Blowing)’라고 표현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뜨거운 불에 시뻘겋게 달구어진 파이프 끝의 유리 덩어리에 입김을 불어넣어서 형태를 잡은 다음에 점차 섬세하게 다듬어간다. 본섬으로 돌아올 때는 날이 갰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람들도 많이 모이는 곳이 산 마르코 광장인데 ‘마르코’는 복음서의 기록자인 ‘마가’를 가리킨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성 마르코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베네치아 상인들이 자기들 고향으로 (빼돌려) 모셔왔다. 재력이 있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서 성화나 성당 조각에 ‘날개 달린 사자’가 등장하면 성 마르코를 표현한 것이다. 베네치아 공화국 깃발 문양도 날개 달린 사자다.


좌: 산 마르코 성당 종탑에 새겨진 날개 달린 사자 / 우: 베네치아 공화국 깃발(무라노 섬 산타마리아 교회 옆)

성 베드로의 상징은 ‘열쇠’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설계한 성 베드로 광장을 높은 곳에서 보면 열쇠 모양이 보인다. 마태복음 16장 18절과 19절에 예수가 베드로에게 전하는 내용이 나온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성 베드로 성당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저 멀리 높이 돔이 보이는데 가까이 가면 라틴어로 적힌 성서 문구가 둥그렇게 둘러서 새겨져 있다.

TV ES PETRVS ET SV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TIBI DABO CLAVES REGNI CAELORVM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피렌체에서는 하루 머물렀을 뿐이라 기록할 만한 게 많지는 않다. 피렌체의 스테이크는 맛이 참 좋았고,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피렌체 대성당)은 생각보다 훨씬 거대했다. 전체를 대리석으로 지은 것은 아니고 색깔을 띤 대리석을 붙여 외벽을 장식했다고 한다.


좌: 포르타 델라 만돌라(성당 북문) / 중: 산 조반니 세례당 / 우: 산 로렌초 성당

대성당에는 청동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문들이 있는데, 위 왼쪽 사진 속의 문은 도나텔로 등이 조각한 것이다. 이보다 훨씬 더 유명한 청동문이 있다. 기베르티가 평생에 걸쳐 만든 산 조반니 세례당(위 오른쪽 사진) 동쪽 문으로 현재는 대성당 옆 오페라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으로 삼아도 되겠다’고 말한 뒤에 “천국의 문“으로 불린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 제19곡에는 “내 고향의 아름다운 산 조반니 세례당”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위 오른쪽에 산 로렌초 성당 사진이 있는데 이곳에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메디치 가문 인물들이 묻혀 있다.

‘두오모’는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도무스’에서 온 말로 보통 돔을 갖고 있는 대성당을 일컫는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두오모가 아련하게 등장한다. 당시 기술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대공사, 지름이 45미터나 되는 거대한 큐폴라(돔을 가리키는 이탈리아어)를 완성시킨 인물은 브루넬레스키로서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만들 때 모범이 되었다. 노동자들에게 이 공사가 안전하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브루넬레스키는 무수히 많은 역경을 모두 이겨내고 이 대공사를 완수했다. 로마 판테온의 완벽한 내부 구조를 보면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아래 사진 대성당 오른쪽으로 노란색 건물이 두 개 보이는데 오른쪽 건물의 네 기둥들 중에서 셋째 기둥과 넷째 기둥 사이에 브루넬레스키(조각상)가 자신의 걸작품인 돔 꼭대기(위 왼쪽 사진 참조)를 바라보고 서 있다. 그의 시신은 성당 지하에서 돔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

↖ 브루넬레스키 조각상 위치

대성당과 멀지 않은 곳에 시인 단테의 생가가 있는데 방문은 하지 못했다. 여러 위대한 영혼들과 만나게 될 다음 피렌체 기행을 기약해본다. 피렌체에서 기차로 1시간 남짓 걸리는 피사에 다녀왔다. 피사 대성당 건물들은 기울어진 종탑(사탑)으로 인한 착시 효과 때문인지 다 삐뚤게 세워진 것처럼 보였다.

왼쪽에 돔이 있는 커다란 건물이 세례당인데 거대한 규모로 지어지다보니 완공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에 따라 시작할 때의 아래 건축 양식(로마네스크)과 윗부분 건축 양식(고딕)이 달라졌다. 오른쪽 대성당 건물보다 늦게 완공됐다. 대부분 사탑 관람객들이고 대성당 안까지 관람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는데 대성당 내부도 어마어마하게 웅장하고 성스럽고 아름답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이다.

사탑에 오르려면 손가방보다 큰 물건은 따로 맡겨야 한다. 짐을 맡기는 건물과 사탑 사이에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레무스 형제가 늑대젖을 먹는 조형물이 있다. 로마 캄피돌리오 광장과 카피톨리니 박물관에도 있고 콜로세움 근처에도 있으며, 아마도 이탈리아 곳곳에 있을 것이다.

피사 전경

사탑 꼭대기에 올라서 미리 준비해간 사과로 갈릴레이마냥 (실제로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물체 낙하 실험 시늉도 내보았다.

당시 사람들은 당연히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빠르게 떨어진다고 믿었으나 갈릴레이는 달리 생각했다.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떨어뜨리면 (진공에서는) 똑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공기 저항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물체로 실험하면 공기 중에서도 동시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폴로 15호 대원들이 달에서 망치와 깃털을 동시에 떨어뜨리는 실험(“Mr. Galileo was correct!!”)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같은 속도로 낙하했다.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도 진공 시설에서 낙하 실험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주의 역사는 약 138억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간을 1년짜리 달력으로 압축하면 수메르에서 인류 최초의 문자가 쓰여지기 시작한 때는 대략 12월 31일 밤 11시 59분 46초다. 즉, 인류 역사는 우주 역사 달력에서 14초 정도를 차지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피렌체에서 망원경으로 달과 목성을 관찰하고 피사에서 낙하 실험을 했던 때는 우주 달력으로는 11시 59분 59초 정도 된다. 그 1초에 우리의 근대 과학 지식이 모두 담겨 있다. 120년에 걸쳐 만들어진 성 베드로 성당이 완공된 때도 그 즈음이다. 그렇지만 성스러움과 위대함은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 사랑도 그러하다. 여행을 하며 불멸의 걸작들을 만난다. 그 안에 깃든 성스러움과 위대함을 느낀다.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여행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우리는 포근하고 안락한 행복을 느낀다,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을 떠올리며, 아멘.